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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Nov 09. 2020

나는 오늘부터 아빠노릇이 조금은 쉬워진다.


요 며칠 대선 정국은 온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집에 TV도 없어 그다지 미국 미디어에 노출될 일도 없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선거 후 뉴스들이 귀에 들어왔다. 팀 미팅에서도 동료들은 선거에 대해 한 두 마디씩 보탰고, 인터넷을 조금만 돌아다녀도 한국발 뉴스나 SNS에서 관련 소식이 들려왔다. 평소 국제 정세나 정치권 뉴스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이번 선거만큼 그 결과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 이민자로 살아가는 나와 가족의 현실 때문이었다.


선거전부터 선거 후 양진영 지지자들이 충돌하는 대규모 폭동이 있을 것을 대비해 미리 장을 봐 둬야 한다는 등 공포 분위기가 조장되곤 했지만, 다행히도 지금 살고 있는 실리콘밸리 지역엔 별다른 사건 사고는 없었다. 사실 캘리포니아주는 대대로 민주당 텃밭이고 이번 선거에서도 과반을 훌쩍 넘는 64%의 압도적인 지지로 바이든 후보가 55명의 선거인단을 가져갔다. 이민자로서 극우 성향의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이는 일이 없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다행인 일이다.


산호세 지역에 살면서 회사에서나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아니 의도적으로 피해왔다. 테크 기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인력들이 이민자들이고, 대체로 반 트럼프 분위기가 지배적이지만, 어디에나 소수의견을 가진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직장 동료가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샤이 트럼프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정치'만큼 피해야 할 대화 주제임에 틀림없다.


선거 개표 초반 트럼프가 승기를 잡아나가는 것을 보며, 아내와 나는 한숨을 쉬었다. 또다시 4년 동안 트럼프를 마주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실 트럼프가 집권한 지난 4년 중 3년 동안 미국에 살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일은 없었다. 지역 인종 비율로 따지면 백인보다 아시아 인들이 대다수이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인종 차별이 그 다시 심한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연중에 트럼프가 미국 전역에 뿌려놓은 극우 성향은 암암리에 백인들에게 스며들었고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와 내 가족 주위에 독버섯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 코비드 정국이 정점이던 올봄,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리고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장을 보러 갔다가, 괴성을 지르며 과도히 피하는 백인을 마주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남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선거 결과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 건너올 때 가족과 함께 살집을 구하면서, 순진하게도 나이스한 백인 이웃들과 어울리며 사는 이상적인 이민생활을 그리곤 했다. 후에 아이들이 다니게 될 학교를 생각할 때도 백인의 인종 비율이 많은 학군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운전 중이거나 주차장에서 사소한 시비가 붙었을 때 손가락 욕을 해대던 이들은 다름아닌 백인들이었다. 그들에게 아시아인들은 이유 없이 적개심을 불태우는 존재였다. 그 일이 있은 뒤로 그들에 대한 환상을 완벽하게 지우게 되었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사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관공서에서 서류라도 떼러 가면 불친절함은 기본이고, 때로는 투명인간 취급하기도 한다. 물건을 사면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칫 바가지 쓰는 것은 기본이다. 이런 불편함들은 이민 1세대로 응당 감수할 문제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역시나 걱정은 내 아이들이 나중에 겪을지 모르는 차별의 문제에 있다. 자라면서 직면하게 될 인종 차별로부터 자존감에 크나큰 상처를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아버지로서 완벽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교차한다.


타국에서 이민자로 살면서 나와 가족을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늘 긴장감을 유지하고 혹시나 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한다. 해 떨어지면 밖에 나가는 일은 삼가고, 운전도 늘 조심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일정 이상의 거리를 유지한다. 미국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행복감의 이면에는 이민자로서 치러야 하는 대가가 늘 따라온다.


출처: CNN


사전, 우편 투표가 개표되면서 선거 형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백악관에서 곧 '거악'이 물러날 것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민자들은 조금이나마 희망을 갖는다. 조 바이든이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CNN 앵커 반 존스가 울먹임이 아직도 이 땅에 희망의 불씨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오늘 아침부터 아빠가 되는 게 더 쉬워졌다. 아이들에게 성격, 진실, 좋은 사람됨이 중요하다고 말해줄 수 있게 됐다"라고 말할 때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의 눈물에 나와 내 아이의 얼굴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기쁜 날이다.



- 예나빠.


표지 이미지 출처: https://www.sfchronicle.com/politics/article/2020-Election-Live-Updates-Trump-Biden-California-15678983.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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