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프라이기에 칼집을 낸 밤을 집어 넣었다. 25분 정도 중불보다 조금 약하게 타이머를 돌렸다. 다행히 밤은 터지지 않았고, 알맞게 익은 밤을 칼로 잘라 숟가락으로 퍼서 입에 넣었다. 밤이 퍽퍽했지만 고소함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올해는 시골집 뒷뜰 밤나무에 밤이 풍년이다. 아마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밤은 풍년이었으리라. 그러나 올해는 밑둥까지 베어버렸던 두 그루의 밤나무가 자라 다시 밤을 토실토실 맺히더니 무성한 밤나무 두 그루보다 먼저 익어가기 시작했다.
주말에 시골집에 내려가니 밤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아무도 밤을 주워가지 않았다. 오롯이 모든 밤이 내 몫이 되어버렸다. 9월이 되었지만 시골의 날씨는 도시의 기온보다 더 높기만 하다. 거기에 습도는 또 얼마나 높은지, 잠깐 밖에 나가 있을 뿐인데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집 밖으로 나오면 다시 땀범벅이 되니 찝찝하지만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다.
장화를 신고 집게를 들고, 작은 바구니까지 챙겼다. 그리고 밤나무 아래로 올라가니, 밤나무 그늘에 매여 있는 흑염소가 나를 보자 울어대기 시작한다. 어서 빨리 올라오라는 소리인가 보다. 인기척이 들리지 않을 때는 그저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하더니, 내가 밖에 나와 서성이면 나를 불러대듯 음메 음메 울어댄다.
염소 옆에서 밤을 주으며, 가시가 토톨토톨한 껍질에서 단단한 알밤을 장화 싣은 발로 꺼내려 하고 있을 때, 흑염소는 계속 나를 뿔로 들이받기 시작한다. 염소들은 신기하게도 아는 척을 뿔로 들이받으며 한다. 염소의 특징이 뿔로 들이대는 것이라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친구네 흑염소 목장을 지나칠 때면 염소들끼리 뿔을 박아대며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염소 싸움을 지켜보며, 염소들은 들이받기를 잘하는 동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시골집에 홀로 있는 염소를 보며, 염소의 들이받는 행동이 단순히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동물은 그저 동물일 뿐이라고 여겼다. 감정이 있거나, 의사소통을 하거나, 무언가를 깨닫는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홀로 있는 흑염소에게는 감정이 있었다. 외로움이라는 지독한 고독 말이다. 그저 풀만 뜯어 먹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들이받는 것으로 서로 교제하며 감정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밤을 줍는 동안 계속 나를 향해 들이받는 염소를 더 이상 받아줄 수 없어 다른 곳에 매어 두었다. 그런 나를 향해 계속 음메~ 울어대는 녀석을 나는 못 들은 척했다. 그러다 떨어진 밤을 줍다가 습기를 참을 수 없어 밤 줍기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리는 양을 보니 염소를 막사로 옮겨야 할 것 같았다. 다시 우산을 쓰고 염소가 매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묶어둔 끈을 풀자 염소는 마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막사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학교가 끝나면 염소 풀을 먹이러 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염소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럴 때면 신기하게 염소들은 집이 어디인지, 어느 골목으로 가야 하는지 알았다. 그래서였는지 동네의 많은 아이들이 함께 염소를 몰고 내려왔지만, 누구 하나 염소의 목줄을 손에 잡고 내려오지는 않았다. 염소들은 자연스럽게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로 몸을 틀었고, 염소들이 지내는 막사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으니 말이다.
올해는 밤이 풍년이다. 밤을 주우며 나는 또 염소와 교감을 하겠지.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나의 다리를 앞뒤로 계속 들이받으며 놀자고 신호를 보내오겠지. 염소의 들이받는 성질이 싸움이라고만 생각했던 나의 고정관념이 모두 사라지는 밤 줍기 시간이다.
고소한 밤을 까먹다 보니 나에게 계속 들이대던 흑염소가 문득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