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기 한 칸 낮춘 밤

by 깊고푸른밤

대다수 직장인들의 하루는
늘 방전 직전에서 끝난다.


아침부터 충전된 적은 없고
어제 남은 잔량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고작 쉬는 주말이 와도
온전히 쉰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침대에 누워 있지만
머리는 이미 다음 주 일정에 가 있고,
손에 쥔 휴대폰은
누군가의 안부나 약속,
혹은 미뤄둔 책임을 다시 불러낸다.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주말은 더 그렇다.


가족이 있고,
처가 식구가 있고,
친구와 지인이 있다.


누군가는 찾아가야 하고
누군가는 불러야 하고
누군가는 챙기지 않으면
관계가 먼저 방전된다.


그래서 주말은
평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출근하지 않을 뿐,
계속 연결되어 있다.


요즘 나는
휴대폰 상단의 배터리 표시를
유난히 자주 본다.


20퍼센트.
아직 꺼진 건 아닌데
마음이 먼저 움츠러든다.


저전력 모드가 켜지면
화면은 어두워지고
기능은 제한된다.


처음엔
내 쓸모가 줄어든 것 같아
괜히 불안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가장 중요한 통화와 문자만 남고
쓸데없는 알림 들은
모조리 죽어 있었다.


불필요한 게 꺼지니
배터리가 닳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다.


우리는 어쩌면
늘 100퍼센트의 밝기로
너무 많은 앱을 켜두고
살았던 건 아닐까.


제대로 작동하려면
가끔은 휴대폰도
완전히 종료했다가
다시 켜야 할 때가 있다.


화면이 꺼지고
잠깐의 검은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처음으로 돌아온 기분이 든다.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직장을 그만둔다고
관계가 꺼지지 않고,
하루를 쉰다고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몸은 집에 돌아왔는데
머리는 아직도
어딘가에 로그인된 상태다.


그나마
'잠'이 가장 비슷한 방식일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식이 잠시 꺼지는 시간.


그런데
진짜 잠을 푹 자고 난 뒤의
그 개운함을
언제 느껴봤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눈은 떴는데
이미 피곤하고,
몸은 누워 있었는데
머리는 밤새 일을 했다.


잠조차
완전 종료가 아니라
대기 모드였던 셈이다.


그래서 오늘은
완전히 끄지 못한 채
휴대폰 밝기만
한 칸 낮췄다.


화면이 어둑해지니
눈이 조금 덜 시리다.


그냥 이대로,
20퍼센트의 불빛으로
잠시 더 두기로 한다.


창밖은
이미 캄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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