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고르지 않은 상태

by 깊고푸른밤

결정을 유예한 날들이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무엇을 해도 괜찮지 않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선택을 '용기'의 영역이라 배운다.

하나를 고르지 못하는 자는 우유부단하고,

머뭇거리는 시간은 비용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우리는 쫓기듯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다.


책임지는 어른 흉내를 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어떤 날은,

결론이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걸

몸이 먼저 안다.


종이 위의 선택지들은 명료하다.

A를 골랐을 때의 득실,

B를 골랐을 때의 기회비용.

머릿속 계산기는 이미 정산을 끝냈는데

손끝은 움직이지 않는다.


펜을 쥔 채,

아직 고르지 않은 상태의 틈새에 머문다.


이 상태는 불편하다.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미숙하게 느끼게 한다.


주변에서는 거든다.

"그래도 하나는 정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도태돼."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정답들이

지금 내 상태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아직 고르지 않은 시간은 공백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이 너무 팽팽해서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장력'의 시간이다.


가능성들이 서로의 멱살을 잡고

잠시 균형을 이루는 순간이다.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는

선택 이후가 아니라

선택 이전의 감각들이 떠오른다.


이 길을 갔을 때의 안도,

저 길을 갔을 때의 후회,

그리고 아무 길도 택하지 않았을 때

느껴지는 기묘한 부유감.


우리는 그 가벼움을 대개 비겁함이라 부르지만,

가끔은 그 가벼움이

아직 무너뜨리지 않은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과도 없고 서사도 없다.

남에게 보여줄 트로피도 없다.


하지만 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판단의 칼날은 잠시 무뎌진다.


옳고 그름, 성공과 실패 같은 말들이

문밖으로 물러난다.


그 빈자리에 남는 건,

지금 내가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건조한 자각이다.


어떤 선택은 용기보다

체력의 문제일 때가 있다.

어떤 결단은 의지보다

회복탄력성의 문제일 때가 있다.


자신의 배터리 잔량을 모른 채

밀어붙인 결정들은

훗날 반드시 청구서를 내민다.


그래서 나는 가끔

결정을 내리지 않는 하루를

의도적으로 남겨둔다.


오늘은 아무것도 정하지 않겠다고,

지금은 판단을 보류하겠다고.


그 유예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문제를 덜 망가뜨린 채로,

내일의 나에게 넘겨줄 뿐이다.


책상 위에는

여전히 A와 B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다.


창밖으로 해가 넘어가며

방 안으로 길게 그림자가 들어온다.

나는 펜 뚜껑을 닫는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방 안,

식어버린 찻잔과 멈춘 시선만이

고요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직고르지않은상태

#판단유예

#결정피로

#생각의장력

#느림의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