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함이 나를 피곤하게 할 때

by 깊고푸른밤

알람은 늘 같은 시간에 울린다.

몸은 생각보다 먼저 반응한다.


눈을 뜨기 전부터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이미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느낌이다.


일정은 낯설지 않다.

반복된 시간표,

익숙한 동선,

이미 여러 번 해본 일들.


문제는 없고,

큰 변수도 없다.


그런데도

아무 일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이미 조금 지쳐 있다.


성실함은 원래

의심받지 않기 위한 태도였다.


약속을 지키고,

정해진 몫을 채우고,

자리를 비우지 않는 것.


그래서 성실한 사람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입꼬리를 조금 올리고

“아닙니다” 같은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그 순간

몸 어딘가에서

미세하게 힘이 빠진다.


성실함이

칭찬이 아니라

역할이 되는 지점이 있다.


빠지면 안 되는 사람이 되고,

대신해 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쉬어도 쉬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순간이다.


그때부터 성실함은

미덕이 아니라 관성이 된다.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멈추면 설명이 필요해진다.


왜 빠졌는지,

왜 미뤘는지,

왜 오늘은 다르지 않았는지.


성실함은

의심을 피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피로를 줄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피로를

조용히 숨겨준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얼굴로,

속에서는 조금씩 닳아가면서.


어느 날 문득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도

개운하지 않은 저녁이 찾아온다.


성과는 있었고,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도

몸은 다음 날을

벌써 걱정하고 있다.


그때 알게 된다.

이건 책임감의 문제가 아니라

회복의 문제였다는 걸.


성실함으로는

버텼지만,

회복할 틈은

남겨두지 않았다는 걸.


그래서 어떤 날에는

일을 덜 하는 대신

자신을 덜 증명하기로 한다.


오늘도 잘하고 있다는 표시를

굳이 남기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조금 느슨해진 채로

하루를 통과한다.


그 선택은

용기처럼 보이지 않는다.

게으름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불이 꺼진 방에서

알람은 아직 울리지 않는다.


해야 할 일들은

내일의 시간표로 밀려나 있고

어둠 속에선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저

느리고 긴 숨소리만

방 안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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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않는소모

#책임의관성

#회복의여백

#느림의태도


(이미지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