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물러난 날들

by 깊고푸른밤

사람들은 오래 남는 날을

설명할 수 있는 사건에서 찾는다.

합격, 계약, 이직, 이별.

날짜를 말할 수 있고

사진을 꺼낼 수 있는 날들.


그런데

오래 남아 있는 장면은

대부분 기록이 없다.


비 오는 날,

지하철 출구 자동문이 열렸다 닫히는 사이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같은 박자로 한 발씩 물러난다.


계단 끝은 이미 젖어 있고

우산을 펴기엔 공간이 모자라다.


앞사람은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켜보고

나는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을 본다.


말은 없다.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몇 초 뒤

자동문이 닫히고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진다.


바닥에 번진 물이

천천히 퍼진다.


현관에 벗어 둔 신발이

한쪽만 살짝 돌아가 있다.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지 않은 채

잠시 서 있다.


불은 켜지지 않는다.

창밖 간판 불빛이

벽 한쪽을 스친다.


씻고,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알람을 맞추고,

이불을 덮는다.


그날은 그대로 끝난다.


다음 날은

그 위에 얹힌다.


지하철은 다시 멈추고

자동문은 같은 속도로 열린다.


계단은 젖어 있고

누군가는 우산을 접는다.


나는 한 발 물러난다.



#브런치스토리

#일상에세이

#도시의장면

#한발물러난날들

#78번째글


(이미지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