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만 앞서 있다

by 깊고푸른밤

'설'이 온다고
세상이 먼저 변하는 일은 없다.


변하는 건
사람들의 리듬뿐이다.


서류는 미뤄지고,
결정은 날짜 뒤로 숨는다.
말은 짧아지고
대답은 ‘연휴 지나서’로 요약된다.


떠난 사람은 없는데
자리는 먼저 느슨해진다.


가게 앞에는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들이 모인다.


지금 살 필요 없는 물건들,
지금 꺼낼 필요 없는 준비들.


필요보다
예정이 앞선다.


약속이 많은 때가 아니라
약속이 뒤로 밀리는 때다.


정해지지 않은 말과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그걸 서로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명절 전의 시간은
평평하다.


기쁘지도
피곤하지도 않다.
기대도 불안도
이름을 얻지 못했다.


곧 날짜가 바뀔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맡은 자리에 앉아
정해진 얼굴을 잠깐 꺼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력만 앞서 있다.


느린 어긋남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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