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화에서 언급했던 대로 퀴블러 로스 모델(Kübler-Ross model)은 한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분노 5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단계는 슬픔을 이겨내는 등의 단계로도 많이 쓰인다.
1단계는 부정, 2단계 분노, 3단계는 우울, 4단계는 타협, 5단계는 수용이라 하였다.
나 역시 고대병원에서 진단받고 서울대병원을 한 번 더 다녀왔다. 정말 간경화인지 간경화라면 어느 정도 진행된 건지, 간경화일리 없다며 부정했던 것 같다. 그 후에 분노하며 술을 더 많이 마셨다. 지난 화에 쓴 것처럼 며칠 내내 하루 온종일 술을 마셨다. 그리곤 눈물이 났다.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그러니까, 술을 마실 때도 아닐 때에도 누군가와 있든 혼자 있든 눈물이 났다.
병원에선 그렇게도 입원하라 외치지만 나는 마음먹고 입원했다가도 하루를 못 넘기고 퇴원하기 일쑤였다.
아직 타협과 수용도 넘지 못한 것 같지만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술을 끊었다. 아니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술 끊기에 동조했다.
바로 직전의 나는 매우 강력한 습관인, 구토 중독을 이겨냈다. 완벽하게 끊어냈다. 그런 내 앞에 더 크다면 더 큰 알코올 중독이 위용을 부리며 서있다.
병원에 입원해서 술을 못 마시는 건 무용지물 같았다. 퇴원해서 다시 마시면 그만이니까. 더구나 나의 마음은 술이 그만큼 좋았던 게 아니었다. 내게는 그냥 진짜 습관. 조금이라도 음식물을 섭취하기 위한 선택 중 하나였을 뿐이다. 아니면 반대로 폭식해서 구토하기위한 습관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밥을 먹으니까 여기서 술만 빠지만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였다.
다음은 내가 성취감과 보람을 느낀 일들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를 데리고 어른들 없이 롯데월드를 다녀왔다.
17살에 혼자 준비하여 배낭여행을 7박 8일 다녀왔다.
스무 살 즈음 대학을 입학했고 휴학 없이 졸업했다.
자전거 여행을 했다.
강원도 일주, 동남아 일주를 했다.
석사에 합격했고 학교를 골라갔고 휴학 없이 졸업조건을 채웠다.
비정상 적이었지만 많은 양의 살을 빼보았다.
백 몇십 대 1의 면접을 뚫고 취직했다.
사 개월간 술을 끊었다.
그러다 거식증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십키로를 뺐다.
구토를 이겨내고 러셀사인을 지웠다. 그리고 더 이상 구토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밥을 먹는다.
지금 내 눈앞에 간경화가 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이었다. 술? 먹지 말아 볼까? 구토를 끊었던 4월의 어느 저녁처럼 갑자기 술도 끊어볼까 싶었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이제는 그래야만 했다. 살려면 더 이상 먹어선 안 됐다.
살고 싶은 마음에 확신을 갖는데만 많은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죽음. 죽음에 대해 여러 미사여구가 붙은 문장들, 긍정적인 말들이 있긴 하지만 왜 이렇게 나는 죽음을 가까이 생각하고 원하는지 잘 모르겠다.
살고 싶어서 죽고 싶은 거예요. 타나토스(죽음)의 힘만큼 에로스(삶)에 대한 힘도 함께 갖고 있겠죠. 더 잘 살고 싶은데 그게 어려워 죽고 싶을 수 있죠. 아름다운 세상을 좀 봐요~ 뭐 기타 등등 좋은 말은 많은데......
심지어 브런치에 나 역시 그런 말을 사용한 적이 왕왕 있어왔다.
하지만 사실 왼쪽 귀로 흘러들어와 오른쪽 귀로 흘러나가는 말들 같았다. 아니 내게는 그러했다. 나는 여전히 죽음을 헤매었고 간이 20% 남았다는데도 오히려 평소 몇 배나 되는 술을 마시곤 했다. 몇 개월이나.
위의 말들이 사실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을 파고들지는 못했던 것 같다.
죽고 싶었다. 삶의 모든 걸, 행복과 기쁨마저도 모두 놓아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럴 때마다 날 지지해 주고 위안이 되어준 지인들이 있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 가지 말라고 살아있어만 달라고, 그러면 나는 죽으려는 순간에 울먹이며 살아달라던 그 얼굴들이 내 눈앞에서 아른거려 시도를 포기하곤 했다..
많은 시간을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했다. 답을 찾아나가기 위해 다음은 나 자신이 좋고 싫은 이유들에 대해 끄적여 보았다.
그리곤 여러 미사여구로 꾸며진 말들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그냥 다 포기하고 싶으니까 죽고 싶은 거라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제와 살기 위해 애쓰기에는 너무 멀리와 버린걸. 정말 너무 멀리와 버린 거야. 내 몸은 이제 걷기도 힘든 몸이고 아주 가까운 지인들에게 유서도 모두 써뒀고 사진도 프린트해 뒀으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재 술을 끊은 지 3주가 됐다. 에~이제 겨우 3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 역시 기적 같은 일이다.
전 회에 썼던 것처럼 구토를 이겨낼 때 내게 좋은 말을 해준 사람들, 내가 날 믿었던 모든 순간들이 가슴에서 키워져 물을 줄수록 강해지며 끊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구토나 술을 끊을 때 저런 긍정적인 말들이 아주 조금씩 내 가슴에 남고 쌓여서 하나의 반짝이는 큰 밧줄을 만드는 것 같다. 그 밧줄을 잡고 지옥에서 올라갈 수 있게 만든다.
정말 치열산 싸움이었다. 타나토스에게 까이는 에로스가 불쌍할 정도였는데 죽음이 아닌 삶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죽음으로 가던 소녀가 정말 다시 삶으로 눈을 돌린 거. 정말 또 하나의 기적이라 생각한다.
그간 신우신염에 걸려 입원을 했어야 했는데 입원을 거부하고 통원치료를 받았다. 그때 나는 일주일을 꼬박 병원으로 나가 항생제를 맞고 오곤 했다. 맞고 와서 또 술을 먹곤 했었지만 돌이켜보면 하루 빠짐없이 치료받으러 병원으로 갔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 안의 에로스가 이토록 열심히 작동 중인 거라 믿는다.
그리고 솔직히 죽는 거 무섭다.
나의 타나토스와 싸워준 모두에게 감사하다.
아무래도 대학병원이고 내 맘대로 예약을 잡아 찾아갈 수 없는 노릇이니 몸이 좀 심각해지면 응급실로 갔었다. 그럼 난 처음부터 중증환자로 분류되어 치료받곤 했다.
하루는 몸이 너무 심각하게 붓고 복수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는 날이었다. 응급실 담당의가 내게 와서 그런 말을 했다.
살 아니고 부은 거니 다이어트 생각 말고 건강해질 생각을 하셔야 해요.
건강 되찾기-> 건강 되찾기 ->그다음이 다이어트. 이런 순서로 생각해야 한다는데 나는 우선 알겠다고 했다.
건강해지려면 밥을 먹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그것도 술 없이 먹을 수 있을까? 무섭고 두려웠다.
예전엔 맥주 한잔하고 한 젓가락만 먹었다. 요즘엔 맥주 한잔 마시고 숟가락으로 와아앙! 크게 여러 번이나 먹는 날 발견했다. 이제 여기서 술을 빼고 밥을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해 왔다. 왜냐면 간경화전에 나는 지독한 섭식장애 환자였으니까.
금주중인 나는 현재 술 없이 밥을 먹고 있고 힘들기보다 재미를 느낄 만큼 잘 참아지고 있다.
삼시 세끼를 모두 챙겨 먹는데 당연히 술은 없다. 언젠가 넘어져 술을 마시는 날이 온다 해도 나는 다시 금주 할 것이다. 그것도 과정이자 성장이니까.
의사가 말한 대로 건강해지기 위해 밥을 먹으니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또 하루 또 하루 그렇게 건강히 챙겨 먹게 되었다.
맛있는 밥을 먹고 건강해지면 알아서 날씬해진다니. 성인이 된 후 이런 마음은 처음이었다. 먹는 것에 죄책감 느끼지 않는 것. 밥 먹는 일이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이 돼버린 것. 먹어야 예뻐지고 무엇보다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 아마도 지금 걷고 있는 곳을 다 지나갈 때면 난 엄청 더 강해져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의 이 시기가 반대로 나에게 엄청난 힘을 줄 것이다.
마음껏 먹고 죄책감 하나 없이 칭찬받는 요즘. 두려움 속에 앉아있지만 행복하다고 느낀다.
늦은 건 없다고 이제라도 잘했다고 토닥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