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

영양소

by 이상필
아빠! 내가 까 볼래요

어린이집에 등원하던 중 딸 유주가 난데없이 배가 고프다고 하여 길가에 차를 세웠습니다. 아침까지 먹고 나왔는데 배가 고프다는 말에 빵집과 김밥집 앞에 서서 무엇을 먹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유주는 빵을 먹겠다고 하여 빵집에서 빵을 사들고 다시 차에 탔습니다. 유주는 기분이 좋았는지 아빠와 빵을 나눠먹겠다며 아빠의 비위를 맞췄습니다. 그런 말에 아빠로서 얼마나 아이가 기특하던지 빵을 열 개라도 더 사주고 싶었습니다. 빨리 먹이고 어린이집에 들어가야 하는 터라 급한 마음에 빵 껍질을 까주려고 아이 손에 있는 빵을 빼앗아 포장 껍질을 벗기려는데 유주는 급하게 스스로 해보겠다며 빵을 달라고 했습니다. 굳이 아이의 제안을 거절하여 기분 상하게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보다 빵을 먹는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결함으로써 성취감을 얻는다면 유주에게도 더 값진 경험이 될 것 같아 빵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유주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빵 껍질을 까기 시작했는데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유주는 빵을 돌려가며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되자 유주는 안된다고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스로 궁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끈기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아니야 조금 더 해봐
할 수 있어

유주는 저의 말에 다시 한번 빵의 포장 껍질 끝을 붙들고 손에 힘들 주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의 반복 끝에 껍질 끝이 찢어졌습니다. 유주는 자신이 깠다며 먼저 말한 대로 저에게도 빵을 하나 나누어주고 자신의 빵도 하나 챙겼습니다. 그러나 그 빵은 8개의 빵을 한 봉지에 담아놓은 빵이었기에 앞서 벗긴 포장 껍질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앞서 유주가 쏟아부은 노력이 가상하여 껍질 끝을 살짝 찢어 유주 손에 놓아주었습니다. 유주는 제가 찢어놓은 곳을 통해 보다 쉽게 껍질을 벗길 수 있었습니다. 빵 하나를 다 먹고 다른 하나의 빵을 먹으려 또다시 포장된 빵을 손에 잡은 유주는 힘껏 껍질을 찢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갔는지 한 번에 성공했지만 빵이 으스러지고 말았습니다. 유주는 빵이 망가졌다며 속상해했습니다. 저는 유주를 달래며 힘을 빼고 다시 한번 해보라고 새로운 빵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제법 수월하게 빵 껍질을 벗길 수 있었습니다.


껍질

세상에 대부분의 것들은 하나 같이 껍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껍질을 보고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습니다. 우리가 먹는 과일과 같은 열매는 껍질의 색깔과 생김새로 그것이 무엇이고 상태가 어떠한지 구분합니다. 그리고 유주가 먹은 빵에도 껍질이 있어 그것을 통하여 빵의 이름과 종류, 다양한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상품들에도 포장이라는 껍질이 있어 안에 든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또 껍질은 안에 있는 것의 좋은 상태를 더욱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도록 지켜줍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껍질을 벗겨야만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던 껍질은 벗겨지게 되면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일쑤입니다.


아이가 내게 준 껍질

유주를 돌보며 저는 육아라는 껍질로 둘러싸였습니다. 아기를 낳고 육아를 하던 중 운 좋게 저는 껍질에 싸이고 있었습니다. 육아는 저를 더 이상 부패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아이를 돌보며 그동안 살면서 쌓아온 생각과 시선을 아이에게 맞추도록 했습니다.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 저는 더욱 멋진 삶을 살아보고자 다양한 경험과 배움을 통해 나름의 생각과 시선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과 시선으로 제 삶의 만족을 위해 고민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과 시선은 저를 행복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그땐 저에게 껍질이 없었습니다. 저를 담아줄 껍질, 지켜줄 껍질, 제가 누군지 분명하게 알려줄 껍질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방황하고 부서지며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하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당시에도 저는 그동안 쌓아온 생각과 시선으로 아이를 잘 키우려 노력했습니다. 자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 또한 제 생각대로 키우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아이를 보살피는대도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가 아플 때도 있었고, 아이가 자랄수록 자신의 욕구를 표출하여 저의 계획에 따라주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저의 계획에 아이를 맞추기 위해 저만의 방식으로 훈육을 하며 아이와 감정싸움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육아 방식에는 아이에게도, 저에게도 행복은 없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가고 아이는 저에게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꾸준히 육아에 대해 공부하던 아내의 조언을 통해 육아 콘텐츠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아이 관점에서 아이를 봐라'였습니다. 저는 그동안 저의 관점에서 아이를 돌봐 왔습니다. 저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 많은 육아 전문가들이 말하는 육아에 귀를 기울이고 유주에게 시선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저에게는 육아라는 껍질이 저를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유주와의 관계는 점점 가까워졌고 새로운 육아의 시선으로부터 나온 생각은 일상으로까지 번져갔습니다. 모든 환경을 아이의 관점에서 보고 생각하는 노력은 저를 겸손한 아빠로 만들었고, 아빠로서 저의 존재를 더욱 부각했습니다.


자식 농사 잘 지었네!

언젠간 저의 껍질도 벗겨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그 껍질 안에는 저의 어떤 모습이 담겨있을지 생각해봅니다.

'자식 농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얼마나 잘 키웠느냐 못 키웠느냐에 따라 '자식 농사'를 잘 지었는지에 대한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농부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해의 기후에 어떻게 준비할 것이며, 땅은 어떻게 관리할 것이며, 그 땅에 무엇을 어떻게 심고, 어떻게 키워 어떻게 수확할지는 농부에게 달린 일입니다.

만약 제가 육아라는 껍질 속에서 저의 상태를 잘 보존해 지혜로운 농부가 된다면 딸을 탐스러운 열매로 수확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도중에 껍질이 벗겨지거나 그 안에서 부패한다면 저의 '자식 농사'는 좋은 열매를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버리기 아까운 껍질

저는 좋은 아빠로서 그리고 좋은 사람으로서 지금 아내와 함께 유주를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많은 열매 중에는 사과, 포도, 복숭아, 고구마 같은 껍질째 먹는 열매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열매의 껍질에는 풍부한 영양소가 들어있어 버리기 아깝습니다. 저는 이러한 열매처럼 겉만 멀쩡해 보이고 속이 썩은 열매가 아닌 껍질에도 영양소가 풍부한, 다 먹어도 몸에 좋은 열매가 되고 싶습니다.

이 아까운 걸 왜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