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약 전쟁

서울, 신의 궁전만 존재하는 도시

by 글쓰는 아재




한창 물질을 초월해 스님 라이프를 즐기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사바세계를 혼자 외면한다고 될 일인가?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닌가? 그래, 존경하는 원효대사 형님도 속세로 뛰어드셨으니 나도 시류에 몸을 담아 볼까나.


“일단 10년 전세 살이 청산하고 집다운 집 하나 마련해 보자.”하고 시세를 살피니 나오는 건 상욕뿐이었다. 이게 인간의 월급으로 가능한 시스템인가? 신 아니라 신 할아버지네 직장을 다녀도 불가능하겠구나.


그런 저런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청약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물론 총도 총알도 없이.


미혼, 무자녀, 청약기간. 가점은 전교에서 꼴찌 하던 때 시험 점수보다 낮으니, 그나마 기회라도 가질 수 있는 건 오로지 무순위 청약뿐이었다. 인생 한방을 노리는 일명 ‘줍줍’은 바라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주목적은 내 집 마련이니까. (공식적으로 노리지 않았다. 오는 ‘줍줍’은 거절하지 않아요.)


‘청약홈’을 회사 ERP 만큼 자주 들락거렸다. 열심히 한다고 될 리가 있나, 인생 다 그런 거지 뭐. 무의미한 뽑기로 허송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문자메시지가 왔다.


무순위 예비 당첨 순번 29번. 일주일 후 선착순으로 계약 가능합니다.


예비 당첨은 뭐고, 순번은 29번인데 선착순은 또 뭐여? 이 괴상망측한 통지의 해석을 위해 구글을 바닥까지 긁어대느라 새벽까지 잠을 못 이뤘다.


“어찌 됐든 한 번 실물을 보기나 하자.” 서울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달려갔다. 지하철역과 거리가 좀 떨어진 두 동 짜리 소위 ‘나 홀로 아파트’. 분양가는 6.5억에서 7억이었다. 덤비든 말든 일단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잠깐만, 정리의 시간


하나. 평생 뽑기라고는 꽝만 뽑아본 내게 왜 갑자기 이런 게 떨어졌을까?

‘나 홀로 아파트’라 불리는 100세대 이하 독립 아파트는 주워도 버리는 물량이다. 이 유형의 아파트는 대단지 아파트에 비해 집값이 오르지 크게 않는다. 즉 투기 목적으로는 쓸모없는 아파트이기 때문에 미분양 발생, 미분양의 미분양 발생, 미분양의 미분양의 또 미분양이 발생한다. 아, 돌고 돌아 나까지 온 거였구나.
둘. 예비 당첨, 선착순 계약, 선착순? 설마 그렇게 원시적인 방법일까 의심했지만 맞다. 아이폰 신형이 출시됐을 때처럼 줄 서서 사야 한다. 선착순이기에 당첨 순번 29번은 의미가 없다. 계약이 토요일 11시부터라면, 이틀 전부터라도 노숙하며 기다려야 한다. 맙소사 7억짜리 부동산을 그렇게 판다.
셋. 실거주를 목표로 덤벼볼까 했다. 현재 집 전세금, 주택 담보 대출, 신용 대출, 책상다리에 받혀 놓은 동전까지 모조리 긁어모으면 가능할 수 있지 싶었다. 그렇다고?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결국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모든 걸 걸어야 할 정도는 아니니까. 좋은 경험이기는 했다. 이 기회가 아니라면 열정을 다해 공부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


IMG-4172.jpg 언젠가는 내게도 동아줄이 내려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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