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함부로 뒤집으면 위험합니다

by 글쓰는 아재
희망.jpg 제주도 새해 일출,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다 잘 될 것만 같았다



발제

「명사」
토론회나 연구회 따위에서 어떤 주제를 맡아 조사하고 발표함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토론회나 연구회 따위는 아니지만 글쓰기를 위한 발제가 필요했다. 두 달 넘게 글에서 손을 떼고 있었기에 새 시작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노트북 화면에 워드를 띄워놓고 한 시간 째 하얀 화면만 쳐다봤다. 주제? 소재? 발제? 굳은 뇌와 그에 지지 않으려 더 딱딱하게 굳어버린 손가락을 풀어보려 애꿎은 핸드크림만 치덕치덕 발라댄다.


“제발 뭐라도 좀 쓰자. 시작이라도 하자 제발.”


“제발”을 외치다 보니 지난 두 달간 주야장천 외치던 “발제”가 떠올라 눈물이 찔끔 고인다. 어떻게든 이직해 보겠다며 자기소개서에 시달리고 면접에 후려 맞아온 두 달. 합격을 위한 소원을 빌며 평소 찾지도 않는 조상님께 싹싹 빌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두 손 비비며 빌다 문득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필요할 때만 찾는 조상님. 가책을 좀 덜고자 제발을 뒤집어 발제를 외쳤다. 무슨 마법의 단어인 마냥. ‘발제, 발제, 발제.’


결과는 탈락. 탈락. 탈락.


화도 내고 짜증도 부리다가 결국 다시 돌아왔다. 반성. 자, 곰곰이 생각해 보자. 이직 활동에 글쓰기만큼 정성을 쏟았는가? 그 정도로 연구하고 연습했는가? 틈만 나면 책을 들고 글을 쓰던 그런 열정이 있었나?


나를 탈락시킨 회사도, 조상님 탓도 아니다. 그래 그건 내 탓이었어. 마법의 단어 같은 요행만 바라던 내 잘못이었어. 암, 그렇고말고. 마법이 그냥 이루어질 리가 있나. 마법사도 작대기를 휘두르고 정신을 초집중해야 할 수 있는걸.


덧붙이기. 사실 그렇게 정성을 쏟은 글 공모전의 탈락 횟수는 회사 탈락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젠장 살풀이 굿이라도 한판 벌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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