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를 찾아서
검은 사각형 하나
화가 말레비치는 대상과 색채를 검은 사각형 하나로 환원했다. 작품은 주제도 대상도 화려한 색채도 없다. 걷어내고 또 걷어내 극으로 간 그림은 최소한의 형상만 남았다. 절대주의. 극도의 간결함. 흰 바탕에 놓인 검은 사각형 속에는 관람자의 감정만 존재한다. 극에 도달한 작품은 아무것도 없는 동시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관람자가 작품을 온전히 채울 수 있으니까)
검은 사각형 둘
고향 마을,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구멍가게 앞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탁자에 놓인 김 한 봉지와 도수 높은 소주 한 병. 노인은 천천히 김 한 장을 들어 입에 넣는다. 이어 소주 한 잔. 잔을 천천히 내려놓은 노인은 조용히 거리를 응시한다. 침묵. 소주 한 잔, 또 김 한 장. 함께 마시는 친구도 곁들일 안주도 없는 독한 소주. 극에 도달한 적막한 술판에 노인은 무엇을 채우고 있을까?
검은 사각형 셋
회사 사무실, 네모난 검은색 결재판. 작고 검은 사각형 속에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결재판은 21세기에 환생한 검은 사각형이다. 희로애락, 한 사람의 삶이 들어있는데 그 정도 과장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먼 미래, 미술관에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결재판이 걸려있을지도 모른다. 제목: 검은 사각형(귀하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검은 사각형 넷
손바닥만 한 스마트 폰. 작고 검은 화면 속에 세계가 전부 들어있다. 관람자의 감정? 이 속에서는 감정을 만들 수도 조작할 수도 있다. 자유도가 극에 도달한 검은 사각형이라고 해야 하나. 작고 검은 사각형은 손목에도 있다. 착용자의 심장 뛰는 횟수까지 알고 있는 검은 사각형은 이제 관람자와 한 몸이 되었다.
※ 검은 사각형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절대 주의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