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드러나고, 타 들어가고, 흔적을 남기고

하루를 위한 하루

by 앤의하루

아침 환기를 위해 테라스 창을 열고는 깜짝 놀랐다.

정원을 가득 채웠던 키 큰 나무들이 하나같이 싹둑 베어져 있었다.

처음 이사 오는 날 키 큰 나무들로 인해 햇볕이 안 들어온다고 가지치기라도 할 수 없겠느냐고 관리실에 의뢰했지만,

아파트 입주민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어렵겠다는 답변만 받았었다.


볕을 가리던 푸른 잎들이 사라진 자리에 청량한 하늘이 남았다.


햇볕 부자가 된 주말 아침이다.

키 높은 창을 다 열어젖히고 파란 하늘을 만끽했다.

하얀 카펫 위에 수놓아진 햇살이 포근했고,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테라스에서 바라본 정경

더군다나 따스한 햇살이 좋은 '다시 가을'이었다.

시간이 허락했다면 웃자란 가지들 정리라도 해주고,

꽃잎이 지는 쿠페아도 다시 예쁨을 뽐내도록 정돈해 줄 텐데.

핑계가 많아지는 요즘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언제 가지치기를 했던 걸까. 창문을 열어보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던 걸까.

햇볕이 이렇게나 예쁘게 부서지고 있었음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던 나 자신이 한심했다.

한 달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새 일주일에 한 번은 병원을 들락 거렸고, 24년 몸 담았던 회사를 떠나느니 마느니 고민도 많았으니

집 안에서의 손길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안주인의 터치가 몹시도 그리웠을 화분들에게도 미안했고, 수북하게 먼지만 쌓여가는 진열장에도 미안했고,

정돈되지 않은 싱크대에도 미안했다.

그렇다고 꽤나 부지런하고 깔끔한 스타일은 못되지 내가.


거실에 늘어놓은 햇볕은 그런대로.

나는 또 나대로의 바쁜 일정을 소화한다.

그 바쁜 일정 중 한 시간이라도 카페에 앉아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게 또 행복이지.

큰 아들 픽업시간 기다리며,

레트로 감성 글쓰기

내 머릿속 스위치로 요즘 커피를 즐겨 마시지 못한다.

변화된 내 삶 속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중 하나.

캐모마일 릴랙스 따뜻하게 한잔.

레트로 감성 부리며 글 쓰기란 살면서 부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다.


카페 창밖을 보니 어느덧 해가 기울며 그림자를 뿌려 놓았다.

얼마 전 태국 음식점에서 마셨던 '타이 밀크티' 생각이 나는 하늘색이다.

하얀 밀크티에 주황색이 엷게 수놓아진 홍차.


하늘이 훤히 드러난 테라스에서 바라본 이 시각 하늘은 어떤 색일까.

햇볕의 그림자가 옅은 주황색으로 드리워진 예쁜 하늘색이겠지?

거의 다 타들어가 재를 남기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또 글 한 줄 적어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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