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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월 May 12. 2024

발전이라는 빛에 가려진 어둠, ‘과학 잔혹사’

과학과 의학의 발전에 존재하는 그림자를 살펴보는 시간


인류의 발전을 꾀한 것들, 수명이 연장되고 편리한 삶을 영위하게 한 것들, 위대하다는 수식어가 붙는 것들. 빛나는 현재를 만들어준 그것들의 이면을 아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희생되고 파괴되며 그 발전이 이루어졌는지, 우리는 그림자를 보지 못한다. 존재하는 사실임에도 잘 알지 못한다. 발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잡음, 부작용을 살펴볼 수 있는 이야기. 지금부터 그 잔혹사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숭고하고 이성적인 동시에 인간적이어야 하는 학문이 또 있을까. 의학은 그를 모두 충족시키는 것과 동시에 윤리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때의 많은 의사가 근본적으로 그것에 어떠한 자책감 없이 윤리를 위반했다. 7장 ‘의사들의 연구 윤리 위반’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한 역사학자는 의사들은 “어떤 전문가 집단보다도 더 일찍 그리고 더 많이 나치당에 가입했다.”라고 지적했다. 치료사인 이들은 특히 사회의 병을 ‘치료’하고 ‘암적인’ 유대인과 집시와 동성애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나치의 슬로건이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동족이 서로를 재단하고 제거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인간도 ‘제거’할 수 없다. 누군가 인류가 살아가는 것에 방해가 되기에 도려내야 한다는 사고를 용납할 수 없다.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정당화할 수 없는 논제다. 이처럼 ‘과학 잔혹사’는 의학의 숨겨서는 안 되는 ‘암적인’ 부분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의사들은 데이터의 비윤리적 성격을 이유로 그 발견을 무시해야 할까? ……윤리적이긴 하지만 추측에 의존한 이론적 방법을 쓰겠는가? 아니면 더럽긴 하지만 실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나치의 방법을 쓰겠는가?]

의학의 이면까지 모든 것을 알았을 때 겪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의학의 발전에 있어서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희생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 자신에게 소중한 이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누군가의 희생 아래 탄생했다고 하더라도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그렇게 하여 더욱 많은 이들을 살리는 것이 희생자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만일 그러한 딜레마를 겪게 된다면 앞선 주장에 기인하여 희생자를 기리고 사랑하는 이를 살릴 듯하다. 7장에서는 그러한 딜레마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과학과 의학의 발전에 어떤 그림자가 졌는지, 어떠한 사건이 있었는지 그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기에 그저 소설처럼 읽을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문득 이 모든 사건이 실재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왜 ‘잔혹사’인지 이해할 수밖에 없다. 흥미롭지만 동시에 큰 충격을 선사하는 이야기. ‘과학 잔혹사’가 전하는 과거에 빠져볼 시간이다.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9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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