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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Jan 23. 2024

종말에도 종말이 올 것인가

영화 <칠드런 오브 맨>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를 세기 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추락하는 출산율, 끝나지 않는 전쟁과 냉전, 이해받지 못하는 개인들. 연장된 수명의 끝에는 지독한 병과 외로움 뿐이며, 인간에게 삶이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무거운 짐이다. 개인들은 하루 하루를 살아가며 이 삶이 언젠가 끝날 수 있음에 위안을 얻는다.


이 고통도 언젠가 끝나리라.
이런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게 조금은 수월해진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죽음을 꿈꾸거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죽음을 꿈꾸는 인간도 있지만, 그러한 인간은 소수이며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본능적으로 삶을 좇는다. 그리고 살고자하는 본능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목전에 다가와 있을 때 더욱 강렬해진다. 


재난, 전쟁, 식량부족 등의 끔찍한 환경이 닥쳐올수록 강렬해지는 삶에 대한 욕구. <칠드런 오브 맨>은 그러한 인간의 본능을 예리하게 응시하는 영화다.

모든 인간이 임신 가능성을 잃었다는 영화의 전제는 인간의 종말 그 자체를 보여 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불임이라는 키워드 뿐만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는 테러와 전쟁이 난무하며, 모두가 적이고, 난민들이 넘쳐나 집과 국가를 잃은 개인들이 넘쳐난다. 안식할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건물이 무너져내리고, 누군가의 발소리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말그대로 아비규환이다. 모든 인간의 불임이라는 것은 결국 이러한 종말적 상황을 아우르는 하나의 은유적 장치다. 인간이 내일을 꿈꿀 수 없는 환경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 

의지와는 별개로, 환경 자체가 가능성을 압박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온천지에 도사리는만큼, 삶에 대한 집착과 강박은 거세지기 마련이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의 인간들은 생명을 잉태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만큼 임신과 출산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가진 것 없는 흑인 소녀 ‘키’는 그런 이유에서 모든 이들의 쟁취 대상이 되며, 이용 대상이 되기도 한다. 키의 뱃속에 들어있는 그 기적적인 생명. 종말의 끝에 다다른 인간들은 그것을 끝내 보고싶어 한다.


아무도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곳에서의 출산이란 의미심장하다. 모든 게 끝난 줄로만 알았으나 끝이 아니었을 때, 그때 가지게 되는 희망은 그 무엇보다도 귀하다. 다양한 이해 세력 속에 속하는 인물들은 그렇게 키를, 정확히는 키의 아이를 쟁취하기 위해 또다시 전쟁과 싸움을 벌인다. 

그 와중에 오롯이 키와 키의 아이만을 살려내기 위해 순수한 명령을 받고 그들을 책임지게 된 테오는 거대한 세력들에 맞서 키를 지켜내야만 한다. 그 싸움은 외롭고 거칠다. 환경에 취약한 임산부, 아이를 데리고 전쟁통 속을 헤메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테오와 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아이의 울음 소리는 모든 인류를 숨죽이게 만드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으니까.


영화의 설정과 이야기의 진행 방향은 음울함으로 가득하다. 마지막, 작은 배를 탄 채 바다 위에서 찰랑이는 키와 아이의 모습은 안도감보다 우려를 준다. 그들이 기대했던 인간 프로젝트라는 것이 진짜로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일말의 확신을 얻었지만, 그 확신이 과연 끝까지 이어질지, 테오 없이도 키와 아기가 잘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온통 불확실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가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종말에도 종말이 온다’는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연대보다 전쟁을 택할 때 인류는 벼랑 끝으로 밀려나지만, 아이의 탄생과 인류 프로젝트의 실존 가능성은 그 많은 종말에 대한 공포를 잠식시킨다. 


태어난 아이를 지켜내고 인류를 다시 만들어보겠다는 실질적 의지는 모든 것을 포기한 인간에게도 희망을 쥐어준다. 모르는 이들에게 서슴지 않고 총질을 해대던 군인들도 아기의 울음 소리에는 총을 내려놓는다. 


그것이 인간이다. 결국에 죽음보다는 삶을 택할 수밖에 없는 동물.


인류의 절멸을 외쳤던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무척이나 공감이 되면서도, 어느 순간 니체의 초인 정신에 더욱 큰 감동을 받게 되는 날이 온다. 세상은 언제나 비극적이고 끔찍하며, 개인이 손 쓸 수 없을만큼 망가져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정말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소멸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은 결코 죽을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살고 싶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목구멍으로 집어 삼킨 채 다음 날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런 정신이 종말의 종말을 가져다줄 태초의 의지일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의 정신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인다.


 <칠드런 오브 맨>은 인류에게 무력한 공감보다 니체적 극복 정신을 이야기해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한없이 커다란 바다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점으로 찰랑이는 인간이지만, 그들은 본능과 의지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영화는 작고 여린 소녀와 상처받은 남자를 통해 그 희망을 보여 준다. 

이 마지막 희망에 과연 울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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