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희생>
<희생>은 연극 같기도 하고, 영화 같기도 하고, 실험극 같기도 하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행동하거나 말을 하는 인물들을 보면 부조리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우울감에 잔뜩 빠져있는 알렉산더를, 곧바로 납득하기는 어렵다. 특히 겨우 여섯살쯤 되었을까 싶은 어린 아들 고센에게 늘어놓는 이야기들은 노망난 할아버지의 유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니체에 관한 이야기다. 정확한 구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센과 걸어다니며 니체의 이야기를 하는 알렉산더의 모습은 참으로 슬퍼보인다.
알렉산더는 왜? 를 찾고 싶어하는 인물인 것 같다.
인간은 진리를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선언하면서 알렉산더는 비관주의에 빠진 듯 보이지만, 그 비관의 속에는 왜? 라는 질문이 들어있다.
물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단념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마치 벼락 비가 떨어지듯이, 갑작스럽게 전쟁이 시작된다.
알렉산더의 아내인 아델라이드는 전쟁의 소식에 두려움과 슬픔을 견뎌내지 못하고 공황 상태에 빠지고, 그건 알렉산더 역시 마찬가지다. 아델라이드는 내내 알렉산더에게 불만족스러워보인다. 그녀는 아마도 행동하지 않은 채 상념에 빠진 비겁한 노인네처럼 보이는 알렉산더가 지겨운 모양이다.
그러나 그 ‘비겁함’은 사실 알렉산더 뿐만이 아니라 <희생>의 모든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다. 전쟁이 터졌고, 포탄 소리가 들리며 땅이 진동한다. 알렉산더의 집도 흔들린다. 그러나 그것 외에 전쟁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멀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라디오 소식, 진동하는 땅의 감촉으로 전쟁을 알아채며 두려워한다. 총과 폭탄이 없는데도 두려워하며, 갑작스레 비관주의를 포기하고는 신에게 진지하게 기도하는 알렉산더의 모습은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갑자기 무슨 기도인가. 게다가 전쟁이 종식된다면 가족도 포기할 수 있다니.
그의 그런 기도는 이기적이고 비겁해보이면서도, 한편으로 숭고하다.
그 누가, 전쟁이 터졌다는 이유로 자신과 가족들까지 포기한 채 진심으로 두려움에 떨며 기도를 하겠는가.
게다가 전쟁터와 멀리 떨어진 그들 가족이 희생당하는 것은 전쟁이라는 커다란 상황 속에서, 인류라는 거대한 집단 속에서 크지 않은 손실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구석에서 몰래 떨고 있는 겁쟁이들. 이들 중 한 명에게라도 희생당할 용기가 주어진 것이 어쩌면 축복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 기도 속에서 깨어난 알렉산더의 배경에 펼쳐지는 세상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전쟁이 끝났는지, 원래 없던 일인지, 아니면 아직도 지속중인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곳은 조용하고 평안하다. 마법처럼 도달한 그 평화 속에서 알렉산더는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집을 불태운다.
집을 불태우기 위해 가족들의 눈을 피해 달아나고, 식탁 위에 의자들을 켜켜이 쌓는 알렉산더의 모습은 여전히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 속에는 아직도 숭고함이 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도 결과가 확실하지 않은 약속을 위해서 자신의 집을 모조리 불태울 수 있는 자가 몇이나 있을까. 어쩌면 알렉산더 한 명 뿐일지도 모른다.
집을 불태운 알렉산더는 병원에 끌려간다. 아마도 정신병원으로 가는 차일까. 가족이 부른 걸까, 알렉산더 본인이 부른 걸까. 그것조차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끝내 스스로 차 문을 닫고 실려가는 알렉산더의 모습을 보면 스스로 만들어낸 상황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끌려가는 와중에,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고센이 보인다. 고센은 영화가 시작할 때는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고센은 이제 말을 할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아버지, 그 말씀이 무엇일까요?”
고센은 죽은 나무 밑에 누워서 나무의 가지들을 바라본다.
<희생>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 뜬금없이 마리아와 동침을 하라는 오토의 말이나, 갑자기 말문이 터진 고센. 죽은 나무를 바닷가의 심는 알렉산더. 응답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실행하는 광인 같은 알렉산더의 모습. 동시에 이 부조리들은 종교적이며, 숭고한 코드로 이어진다.
하녀의 이름이 ‘마리아’라는 것은 당연지사고,
사실 종교에서의 이야기들은 온갖 부조리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무신론자 입장에서 보기에 알렉산더는 광기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유작이라고 한다. 그는 암에 걸려서 죽었다. 그 고통의 끝에 서서 만들었다면, 이 영화의 부조리한 간절함이, 그의 ‘희망과 확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의 관점에는 한계가 있다. 부조리로 가득 찬 종교가, 확실한 이성적 응답이 없는 기도가 삶의 끝에 선 사람에게는 희망일지라도,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고센에게는 희망고문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고센이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는 것 같지만, 고센은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한마디로 삶을 살아가는데에 실용적으로는 쓸모가 없는) 추상성과 불타버린 집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응답없는 아버지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 남겨진 것들 속에서 고센은 이겨내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희생>은 약한 영화다.
흔히 죽음을 앞두면 사람이 감성적이고, 약해지듯이. 현실에서의 명확한 논증보다는 부조리한 믿음과 희망이 더 힘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아직 삶의 중앙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지나치게 상념적이고, 나약해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무신론자라면 더더욱 그렇게 느낄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이라는 숭고한 정신은 왠지 자꾸 영화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한 가지 궁금한 점. 만약 알렉산더가 죽어가는 인간이 아니었어도,
그토록 철저하게 희생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