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를 꿈꾸게 한 호혜의 장소 : 동네 카페 샘

내 생애 두 번째 연구소를 마음먹다

by 하진


니트 생활자라는 단체가 있다. 무업 청년들이 마치 회사에 다니듯 니트 생활자 공간으로 출근을 해서 가상회사놀이를 하며 삶의 리듬을 찾고, 외부 활동을 통해 활력도 얻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나에게도 니트 생활자 같은 공간이 있다. 연구소를 마음먹기까지 나도 많은 시간을 방황 아닌 방황을 하며 보내야 했는데, 오랜 기간 내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동네 카페 '카페 샘'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언젠가 어떤 모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카페 샘을 그 공간으로 꼽았던 것 같다. 샘에서 여러 행사도 열었고, 동네에서 시간을 보낼 때면 언제든 들러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곤 했다.


IMG_5006.jpeg 세상과는 다른 여유의 시간이 흐르는 것 같은 샘


샘 사장님 경민이 형은 언제 어떤 순간에 찾아가도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내 삶에 대해서 평가나 조언 없이, 잘 들어주되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전에 이야기한 그건 어떻게 되었어?'라고 물어준다. 다시 연구소에 대한 구상을 하고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끌고 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게 나와 잘 맞을 것 같다고 가장 지지해 준 것도 그였다.


몇 달 전 그때도 그렇게 샘을 방문해서 이야기 나누다가 시간을 정해서 샘에 나와서 커피에 대해서도 배우고 시간을 함께 보내면 어떻겠냐고 형이 내게 제안을 했다. 아마 무업기간이 길어지면서 느꼈던 불안이나 외부 활동이 줄며 느끼는 외로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 같다. 약속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처지가 초라해 어딘가 찾고, 누군가를 만나기 힘들어지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그렇기에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밖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이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고, 그날 형이 커피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니 시간도 훌쩍 지나가서 우울감이 좀 사라지기도 했던 것 같다.


(무업기간이 길어지면)약속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처지가 초라해 어딘가 찾고, 누군가를 만나기 힘들어지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그날 이후 매주 하루 샘에 가서 로스팅도 배우고, 커피 맛을 잡아보는 연습도 하고, 새로운 블렌딩이나 메뉴 레시피를 잡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내가 가게 차리거나 알바를 할 것도 아닌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나 싶었지만 나가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혼자 있을 때의 외로움이나 기약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많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기기의 상태에 따라서, 내리는 사람에 따라서 작은 변수들이 만들어내는 커피 맛의 변화도 흥미롭고 로스팅 기기 앞에 앉아서 볶아지는 커피 향을 맡는 것도 나름 힐링이 되었다. 새로운 블렌딩을 만들어 보기 위해 커피 비율을 바꿔가며 맛을 보며 카페인 과다 흥분상태가 되기도 하고, 저번주는 최적의 밀크티 레시피를 찾는다고 설탕과다 섭취 상태가 되기도 하고. 단순히 알바로서의 일이 아니라 무언가를 찾고 개발하는 일 자체가 활력이 되었다.


IMG_5958.jpeg 내겐 너무 예민한 커피. 커피는 기계가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내리는 것이란 걸 배운다.


앞으로 언제까지 이 상호 대가 없는 호혜적 출근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이러한 버팀목의 장소와 사람들이 있어서, 지나치게 우울해지거나 좌절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하루의 시간이지만 간간이 찾아오는 마을 사람들과 사는 이야기를 하고, 오늘은 동네 축구팀 선발에서 떨어져서 우울해하는 경민형 아들 유솔이 와 함께 공을 차고 놀기도 하고. 앞으로 언제까지 이 상호 대가 없는 호혜적 출근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이러한 버팀목의 장소와 사람들이 있어서, 지나치게 우울해지거나 좌절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이제 더 이상 청년은 아니니까, 니트 생활자 같은 서비스의 대상은 아니지만 어쩌면 장년들을 위해서도 이런 공간이나 서비스가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에 대한 영향도 줄어가는데 단순 교육이나 실업 수당을 위한 증빙을 활동 외에도 구직자들에 와닿을 수 있는 보다 다양한 접근의 서비스가 개발되면 좋겠다. 그러한 활동을 이런 마을 기반의 공동체나 조직들과 연결해 볼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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