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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진 Feb 06. 2023

사회적 자본의 두 얼굴

신간 <공동체의 감수성> 읽기 - 02

1. 부르디외, 콜먼, 퍼트남 - 사회적 자본에 대한 다양한 시각


사회적 자본 이론의 핵심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 <나 홀로 볼링>, 로버트 퍼트남


볼링은 미국에서 흔히 즐기는 대표적인 '클럽'스포츠였습니다. 마을 볼링장을 중심으로 볼링 동호회가 결성되고 사람들은 모여서 볼링을 치고, 동호회 간에 친선전도 벌이는 등 스포츠를 통해 다양한 교류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동호회에서 볼링을 즐기는 사람들이 줄고, 혼자서 볼링을 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퍼트남은 이 현상을 논의의 출발로 삼아 미국의 공동체와 연대가 무너지고 또 새로운 모습으로 재 탄생 하는 모습을 서술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Bowling Alone' <나 홀로 볼링>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나오는 개념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입니다. 글의 처음에도 언급했듯 사회적 자본은 관계 자본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개인이 가진 문제나 사회적 필요를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마치 재화처럼 쌓을 수도 있고, 활용할 수도 있는 개념으로 정리한 것이 사회적 자본입니다. 사회적 자본 개념은 퍼트남이 고안한 개념은 아닙니다. 퍼트남은 책에서 최소 6인의 학자들이 이 개념을 사용하며 발전시켰다고 쓰고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두 학자는 '피에르 부르디외'와 '제임스 콜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감수성>에서도 퍼트넘, 부르디외, 콜먼 세 사람의 사회적 자본에 대한 견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술적으로 사회적 자본의 이론적 검토를 할 때에는 이 학자들의 이름이 나란히 등장하곤 하지만 사실 마을 공동체 정책 차원의 문서에서는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개념만 소개될 때가 많습니다. 때문에 이 학자들의 견해를 통해서 사회적 자본 개념을 톺아 보며 마을공동체 정책과 연결 지어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공동체의 감수성>이 기여하고 있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비교하자면 '사회적 자본'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은 퍼트넘, 비판적 견해를 가진 사람은 브루디외, 콜먼은 기능적인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 개념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 거의 논의하지 않은 것으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반면 브루디외는 사회적 자본을 계급 세습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했습니다.  콜먼의 사회적 자본 논의는 합리적 선택이론 (Rational choice theory)을 바탕으로 사회적 자본이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 구조라는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브루디외는 사회적 자본이 계급의 재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유형의 자본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계급 재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자본 유형으로  '문화자본'을 들 수 있는데요. 문화자본은 부모세대가 가진 문화나 교양의 자산이 자식세대에 전이되어 영향을 미칩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고, 좋은 음악이나 문화도 어렸을 때부터 접해봐야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사회적 자본은 사람들이 가진 연결망으로 인해 가시, 비가시 적으로 얻는 혜택이나 기회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깝게는 '우리 아빠가 누군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아빠, 엄마가 연결해 줄 수 있는 인맥이 주는 힘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망이 직접적인 혜택을 주지 않더라도 이들과 교류하면서 가지게 되는 정보, 경험은 다시 나에게 도움이 됩니다.  


부르디외는 과거에는 부와 권력의 세습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가 되면서 이와 같은 상속이 은폐되어야 할 필요가 생겼고 문화, 사회적 자본들은 경제적 자본의 세대 이전을 은폐, 위장할 수 있는 비밀 통로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부르디외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논의하는 마을공동체 안에서의 사회적 자본이 계급의 재생산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비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브루디외의 비판적 관점을 공유하여 생각해 볼 지점은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 자본이 이를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구별 짓는' 기준이 되거나 개인이 획득한 사회적 자본을 공공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사적으로만 활용하면서 공동체 안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활용할 때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지역으로 이주한 청년을 위한 사회적 자본>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도시에서 살다가 지역으로 이주한 청년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가 낯선 지역에서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소개되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추상적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쉽게 말해 '너는 '우리'가 아니니 '우리'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요구는 다양한 폭력이나 억압으로 작용해 청년들의 정착을 어렵게 했습니다. 


지역에 가게를 차린 청년에게 마을 상인회가 매일 아침 문안인사를 요구하거나 남자친구의 고향으로 이주한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누구누구의 여자친구'로만 불리는 경험을 하는 등의 사례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상반된 경험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지역으로 이주해 정착하려는 청년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땅을 내어주고, 농사기술을 전수할 사람들을 소개해주는 '마을 어른'을 만난 경험. 자신을 마을의 중요한 회의에 데려가 의견을 경청하며 마을 일원으로 존중해 주었던 경험을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면 콜먼은 사회적 자본을 사회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 기능으로 이해했습니다. 앞서 콜먼이 '합리적 선택 이론'을 통해 사회적 자본을 설명했다고 이야기했는데요. 쉽게 말해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하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선택을 하며 목표를 달성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데 사회적 자본은 이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전략적으로 맺는 선택적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콜먼의 이러한 논의는 '사람은 경제적 동물'이다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효용의 극대화를 위한 합리적인 선택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관계마저도 그와 같은 원리를 따른 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콜먼의 논의는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요소인 '규범'적 측면 -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행동의 근거가 되는 규칙이나 제도를 따르는가에 대한 내용-은 잘 설명하지만 포괄적인 신뢰에 대한 측면 - 자신에게 직접, 즉각적인 보상이 뒤따르지 않더라도 타인을 믿고, 혜택을 베푸는 것-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신뢰조차도 개인이 득실을 따져서 신뢰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르디외와 콜먼 각자가 가진 관점에 따라 사회적 자본이라는 용어를 활용하고 적용하는 지점이 달라서 단어는 같은 용어로 쓰고 있지만 개념이 통일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두 사람다 사회적 자본을 개인의 특성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퍼트넘 역시 그만의 관점으로 사회적 자본을 서술하고 있지만 특히 다른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그는 사회적 자본을 지역과 국가 단위 차원의 보다 거시적 특성에 연결해 설명합니다. 


퍼트넘은 남부와 북부 이탈리아의 비교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지방자치제도를 연구하 면서 이탈리아 북부가 남부지역보다 정치와 민주주의 발전이 잘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하였고, 그 원인이 북부가 남부보다 시민참여의 전통, 상호호혜적 규범 등이 풍부한 사회적 자본이 발달한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사회적 자본을 "협력된 행동을 촉진함으로써 사회의 효율을 개선시켜 주는 신뢰, 규범, 네트워크와 같은 사회적 조직의 요소들"이라고 정의합니다. '사회적 자본이 발달한 나라는 사회의 효율이 개선되며, 사회의 높은 효율(경제성장, 민주주의의 발달)은 곧 사회적 자본의 발달에 의한 것이다.'라는 생각을 전파하는데요. 얼핏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같은 논의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왜일까요. 


이상 세 사람의 사회적 자본 개념을 소개했는데요. 이러한 개념적 논의와 발전을 통해서 사람들은 사회적 자본에 대해 이해해갔습니다. 이에 통일된 정의에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일반적으로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요소로 '신뢰', '규범', '네트워크'를 꼽고 각각의 요소들이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2. 무엇이 마을 공동체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가?


<공동체의 감수성>에서는 '서울의 마을공동체 정책'이 퍼트남의 논의를 바탕으로 설계되었음을 지적하면서 '과연 퍼트넘이 주장한 사회적 자본 개념이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자본 --> 사회참여 의식 성장 --> 민주주의 발전 (?)


저자가 길게 세 명의 학자를 들어가며 사회적 자본 개념에 대해서 살핀 것은 아마도 사회적 자본 개념이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개념임에도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이 퍼트남의 사회적 자본 개념만을 통해 설계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 합니다. 퍼트남의 사회적 자본 관점을 현실에 적용할 때의 한계가 있기에, 우리가 자세히 살피고 적용하지 않았던 사회적 자본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실제 저자는 이 논의의 말미에 자신은 사회적 자본을 '은폐된 경제적 자본'으로 보는 부르디외 시각을 공유한다고 쓰고 있기도 합니다.  


저자는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개념을 바탕으로 설계된 위와 같은 정책의 이상의 도식이 현실에서 적용될 수 없었던 원인을 살핍니다. 우선 열려있다고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를 포괄할 수 없는 마을 공동체 활동의 현실에 대해서 꼬집는데요. 마을 공동체 활동이 '여성, 기혼자, 중산층' 등 몇 가지 특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사업으로 진행된 현실에 대한 비판입니다.


마을 활동은 주로 낮 시간, 정주하는 지역에서 활동이 가능한 사람들의 참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퍼소나는 '여성, 기혼자, 중산층' 즉 '정주하는 지역에 남아 여타의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생계유지가 가능한 특성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제한되었습니다. 저자는 다양한 사람의 참여를 통해 사회적 필요를 해결하고, 공동체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을 사업의 목적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실제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특정한 특징을 공유하는 사람들 만이 공동체가 되어 참여하는 경향이 반복된다면 결국 목적하려 했던 사업의 결실 또한 그 특정한 사람들의 집단만 누릴 수 있게 된다고 비판합니다.


사업이 성숙하지 않았고, 과도기이기에 이러한 결과가 있었던 것이고 보다 시간이 지나면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반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술 밥에 배부를 수 없다는 것인데요.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잘못된 방향으로 설정된 사업이라면 이를 지속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낙관주의'라고 말합니다.


마을 사업이 지역의 자치로 연결되는 설계를 가지고 있기에 더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라는 것입니다. 마을 사업이나 활동은 가능한 사람들이 참여를 통해 만들면서 포괄하지 못한 대상이 확대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맞다 하더라도 이것이 의제를 중심으로 한 자치의 활동, 직접 민주주의의 장으로 연결되는 설계라면 이대로 마을 사업이 포괄하지 못했던 소외계층 혹은 청년, 남성 등의 다른 특성을 가진 집단을 두고 본 채로 진행하는 것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기초를 무너트리는 일이라고까지 언급합니다. 


저자의 문제제기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입니다. 우선 과연 사회적 자본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지나친 채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긍정적 자본으로만 여길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한데 이를 바탕으로 설계된 정책은 지역의 공동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이상적 구조만을 담고 있을 뿐 구체적 내용에서는 민주적 원칙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여가 배제되는 구조적, 문화적 현실은 그대로 둔 채로 마을 활동이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말을 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이 이익을 볼 것이 뻔한데도 이를 개인의 선택의 자유로서 설명하는 '은폐'와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평가는 마을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마을이나 공동체를 경험한 각자의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읽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노력한 사람들이 서운할 정도의 박한 평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너무 공감될 뿐 아니라 적확한 평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두 가지 감정을 공유하며 이 부분을 읽어갔습니다. 



3. 공동체 참여에 배제당하는 것인가 고립시키는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위에 언급한 서울 마을 사업의 평가들은 '서울의 마을공동체 사업'의 한계 중에도 특히 이 활동이 자치와 연결되는 지점에서 특정 배경과 조건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로 과대 대표되는 현상과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후 연결되는 논의인 다양한 사람들의 공동체 참여가 제한되고 배제 구조가 형성되는 원인과 구조를 파악하는 논의 내용은 조금 단편적인 것 같아 아쉽습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마을 공동체 활동 참여 '배제의 구조'는 크게 물리적 구조와 문화사회적 구조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물리적으로는 생계 참여로 인해 사람들이 공동체활동에 참여하기에는 '시간부족' 상태에 있기 때문이고. 문화사회적으로는 '고정적 성별인식'으로 인해서 돌봄을 담당하는 여성들의 참여 중심으로 마을활동이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제를 대표적으로 짚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없어서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시간을 확보해도 문화사회적 인식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확보된 시간이 공동체 활동에 쓰인다고 확언할 수 없기도 합니다.


앞서 사회적 자본의 다양한 시각을 공유하며 사회적 논의에서 놓쳐진 부분을 이해시키는 것은 좋았지만 이 부분에 와서 배제의 구조와 원인을 설명하는 부분의 논의는 좀 아쉽습니다. 우선 배제의 물리적 구조를 '시간'자원의 차원에서 단순화시켜서 이해한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공동체 참여 배제의 대표적 원인이자 이유로 등장하는 시간 빈곤이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다른 원인들로 인한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성해 살아내야 하는 개인화된 사회에서 활동 참여를 결정하는 것은 각 활동 간의 개인적 우선순위에 따른 결과 일 것입니다. 만일 그 우선순위의 최 상단에 '생존을 위한 생계'가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당연한 일이라면 두 번째나 세 번째 혹은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공동체나 지역사회가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에 오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인의 원인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자는 시간 빈곤으로 참여가 배제된 대표적인 대상으로 청년을 꼽으면서 그 사례로 30대 남성의 시간 빈곤에 대해 설명합니다. 예시로 나온 '30대 남성의 하루'라는 표를 봅시다. 일하고 밥 먹고 자는 시간 제외, 24시간 중 5시간의 자유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30대 남성을 보면서 이 사람이 시간 빈곤에 빠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공동체 활동 참여의 성별 차이를 성별 고착화에 따른 문화적 장벽으로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는 가정 및 돌봄 노동에 투입하는 세대별 성별 평균시간을 보면 30대 남성은 하루 55분을 투입하는데 반해 30대 여성은 4시간 55분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생계유지 외 시간을 온전히 자신 개인의 재생산 시간으로 쓸 수 있는 남성과 돌봄 노동으로 제약받거나 심지어 생계와 돌봄 둘 다를 동시에 해내야 하는 여성의 상황을 같이 놓고 비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절대적으로 5시간이라는 개인시간이 인간적 삶을 누리기 위해서 부족한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빈곤 논의에 이어 성별역할 고정 문제를 다룸으로써 참여의 제약으로써 이 둘이 연결되어 있는 문제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기에 다시 '그럼 여성은?'이라는 질문이 따라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근거로 다루는 통계가 시간 빈곤의 근거로서 공감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저자는 중산층 중심의 마을활동을 비판하며 저소득층의 참여 배제를 문제삼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욕구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하는데요. 사람들은 기본적인 생계 욕구가 해결되어야 그다음 삶의 질이라는 공동체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다고 설명합니다. 상식적 차원에서야 '그래 먼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역시 저소득층은 생계가 해결 안 되면 삶의 보다 높은 차원의 가치를 추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강화시킬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청년허브의 '청년참'사업에 대해 연구할 때의 일입니다. 청년참은 청년 세 명이 모이면 모임 활동을 지원해 주는 사업입니다. 반드시 같은 지역 사람들일 필요도 없고, 몇 번 모임을 해야 한다거나 어떤 결과물을 꼭 도출해야 하는 사업도 아닙니다. 이런 모임 활동에서도 남성보다는 여성의 참여가 더 높았습니다. 단순 참여자의 비율보다는 대표 참여자의 성별에 대해 확인했었는데요. 여성이 모임 대표자인 경우가 49.5% 남성이 모임 대표자인 경우가 13.8% 남녀가 혼성으로 공동대표자인 경우가 36.7%였습니다. 여성이 대표자로 참여하는 경우가 86.2%에 이른 것인데요. 청년참에 참여하는 여성 청년들의 경우 돌봄 관련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지역의 정주성이 영향을 주는 활동도 아닌데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은 왜일까요?


저는 청년기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개인화된 주체로서 여성들이 가진 자원이 남성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상을 하나의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이미 남성 중심으로 짜인 사회문화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여성들에게 100만 원의 모임 비용도 물리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이미 가부장적 사회구조로 짜인 판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힘든 상황에서 탈가부장적인 커뮤니티를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선택함으로써 서로의 자원을 나누어 자신의 삶을 탐색할 자원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정말 문제는 남성들이 이 영역의 자원에 대해 큰 매력을 못느낀다는 점이지 적어도 시간이 부족해서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더 큰 기회나 자원의 획득이 용이한 남성들에게 마을에서의 사업이나 활동을 통해 얻는 유익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을 공동체 활동 참여에서 성별에 따른 참여 격차에 고착화된 성별 인식이 영향을 주는 것은 전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근본적으로 기울어져있는 자원의 성별 비 대칭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정의 남성들로부터 활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돈 안 되는 일 하고 다닌다"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자신과 사회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여성들의 활동의 '문제적 부분'이 비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 대한 주어도 없이 부각된 채 거기 참여하지 않는 청년이나 남성들이 '시간 부족'현상과 '고정적 성별 인식'으로 인해 '배제된' 것으로 읽어지는데 불편함을 가져보았습니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제도적, 문화적 한계를 그대로 둔 채 마을 활동이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말을 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이 이익을 볼 것이 뻔한데도 이를 개인의 선택의 자유로서 설명하는 '은폐'와 다름없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마을 공동체 활동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흔드는 위험이 있다고 설명되어야 할까요? 공동체와 공동체 참여자 그 참여자의 다양성을 위한 교차적 관점에 대해서 보다 세밀한 논의가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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