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진 Feb 03. 2023

현대사회에 공동체는 존재하는가?

신간 <공동체의 감수성> 읽기 - 01

<공동체의 감수성>은 연구자 구현주 님이 서울의 마을공동체 사업 전개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사업을 통해 마을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만들 수 없다면 그것은 왜 그럴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쓴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연구자에 대한 정보는 없었지만 마을 공동체를 비평적으로 다룬 책이 많지 않기에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2019년에 진행했었던 ‘서대문구 마을 주민의 마을공동체 공모사업 참여자의 경험에 관한 연구’(이하, 서대문 마을 연구)가 떠올랐습니다. 연구의 깊이와 넓이야 서울의 공동체 사업에서 자치와의 연계까지 연결해 다룬 <공동체의 감수성>을 따를 수 없겠지만, 마을 공동체 공모사업이라는 것이 공동체의 사업화 전략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비슷하게 겹쳐지는 내용도 있고, 생각을 달리하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대문 마을 연구 최종 보고에서 사용했던 장표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공동체라고 부르는지 혹은 ‘언제’ 공동체라고 부르는지 그리고 ‘왜’ 공동체로 활동하려 하는지 그리고 그 인지와 판단 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대문이라는 지리적 배경이 마을공동체 활동에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공간’이 공동체 활동과 인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주요한 질문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른바 ‘지금 시대에도 공동체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공동체 문제’라고 부릅니다. ‘그게 왜 없어? 우리 공동체라는 말 다 쓰잖아.’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이 주제는 학계에서 많이 논의되었던 주제라고 합니다. <공동체의 감수성>도 초기 논의를 이 ‘공동체 문제’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오늘날'마을공동체 만들기는 가능한가 / 마을 공동체 만들기는 ‘사업’으로 가능한가 (따옴표시는 저자)에 대한 가능성을 묻고 있습니다. 주로 공동체와 서울시의 마을 사업과의 관계를 묻는 것 같지만, 이 문제가 공동체 소멸론-공동체 존속론에 맞닿아있는 질문임도 재 확인하면서 우선은 공동체를 둘러싼 우리 사회에서부터 폭넓게 확인하면서 들어가고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힐러리(George A Hillery)의 공동체 정의에 관한 연구를 소개하면서 지역공동체의 공통요소로 발견되는 ‘지역’, ‘사회적 상호작용’, ‘공동의 결속감’을 서울 등에서 정책사업으로 진행하는 마을공동체가 공동체의 기본요소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요소를 ‘고전적 공동체 조건’이라고 표현하는데요.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 조건들은 현대사회 도시가 지닌 한계로 인해 달성되기 어려운 조건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도시민들은 직장문제, 주거 문제, 결혼이나 학업 등으로 과거보다 한 지역에 머물러 살기 힘듭니다. 낮은 정주율, 공동의 작업이 부재한 도시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굳이 알려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편하게 느끼기도 하지요. 우리나라는 공동체가 발달해 있어, 우리나라는 정이 살아있지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마치 그건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유니콘 같은 환상이 아닌지 되묻게 되는 것은 여러 통계 자료들이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에 대한 지표가 아주 낮은 것으로 보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저도 자료들을 보면서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도 인용하는 OECD의 삶의 질 지표(Better life index)는 저도 자주 인용하는 지표인데요.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친척, 친구나 이웃이 있는지’를 묻는 공동체 부분 조사에서 2018년 한국은 조사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살펴봐야 하는 것은 정부나 지자체가 마을공동체 활동을 정책적으로 펼치는 이유입니다. 물론 공동체가 살아있는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는 관계성의 향상이 시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때문에 이런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맞겠습니다만, 저자는 이 정책이 ’ 마을공동체가 도시문제의 해법’ 임을 전제로하여 수립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시민들이 현장에서 기울여오던 운동적 실천과 공공의 지원이 만나 “마을은 도시의 문제를 풀어줄 해법이 될 수 있다”라고 기대한다’ 


문제는 앞서 삶의 질 지표에도 보듯이 우리 사회에 공동체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자체에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공동체성이 약화된 현실입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기는커녕 공동체 형성 자체가 문제가 되어버린 현실인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지역의 시계는 바빠집니다. 지역의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데 문제 해결이전에 공동체도 형성해야 하고. 서로 되먹임 과정을 거치면서 발달해 가는 이상적 그림을 그려보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저도 현장에서 연구도 하고, 때로는 직접 마을 사업들을 진행하면서 이 불편함에 대해서 계속 고민했습니다. 흔히 ‘마을의 시계와 행정의 시계가’ 다르다고 표현하는 속도감의 문제가 대표적입니다. 행정의 문서는 공동체가 1개월의 준비과정 2개월의 교류와 교육을 거치면 준비가 완료되어 문제에 뛰어들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며 결과 도출까지 6개월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을 주어주곤 합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정말 그런 방식으로 도식화되어 발전할 수가 있을까요. 과제 중심의 공동체 사업 운영은 퇴니스가 말한 게마인샤프트적 공동체라기보다는 (이익에 기반한) 선택을 바탕으로 한 게젤샤프트 모습에 가까워집니다. 


서울의 청년 커뮤니티 연구에서 보였던 선택공동체로서의 탈-전통공동체


흥미로운 것은 이 변화는 현장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대사회에서 이익에 기반한 선택적 공동체의 형성은 너무 일반적인 일이어서 전통적 공동체 지향활동 보다 현장에서의 수용성이 더 높게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의 청년커뮤니티 작동에 관한 탐색적 연구>를 통해서 확인한 것도 그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혹은 같은 지역에서 자라거나 같은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전통공동체는 소수가 되고, 오히려 목적을 기반으로 이유를 바탕으로 서로 모이고, 협력하고, 일을 이뤄나가는 공동체 활동이 청년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공동체의 문화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과연 문제가 되느냐 라는 질문에 있어서도 의견은 엇갈릴 수 있습니다. 저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이론을 바탕으로 이 과정을 살펴보았는데요. 개인화된 사회로의 이동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와 함께 그 삶을 온전히 홀로 이끌어가야 하는 책임’을 각 개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경쟁, 입시 위주의 전통적 교육 과정과 가부장적 가족이 유지되는 한국사회에서는 청년주체들이 이러한 자유와 책임을 다룰 만한 공간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홀로서기를 해야 할 때 이 주체성과 책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를 ‘찾아서 함께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내 삶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일로 여겨집니다. 과거에는 가족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었지만 한국사회에서의 가족은 가부장적 우리 게 체계만을 가지고 서로를 책임져 줄 수는 없는 형태로 변화했습니다. 가족의 구성원들 조차 각 개인의 생존을 위해 오롯이 투쟁해야 하는 위험 사회 속에 내 던져져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복지의 발전을 경제를 위해 내어 준 한국사회는 위험사회 중에서도 초-위험사회로 분류되곤 합니다.   


개인이 오롯이 삶을 책임질 주체가 된 위험사회의 상황을 실직청년의 토로를 통해 보여주는 영화 엑시트의 한 장면입니다


다음 논의로 나아가기 전에 저자는 흔히 마을 공동체 사업등에서 보이는 ‘불편한 비교’에 대해 지적합니다. 도시 사회를 문제가 많은 사회로 보고 이를 공동체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태도자체를 문제 삼은 것인데요. 일정한 정도의 과거 공동체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깔린 비교입니다. 이는 급속한 도시화, 산업화 자체가 사회 문제의 근본 원인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사실 도시화나 산업화는 현상일 뿐 원인은 도시화를 이끈 ‘자본과 권력의 문제’ 임에도 이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과거회귀’, ‘다시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으로 단순화, 낭만화하여 전달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마을 활동가들 그리고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근본적인 자본과 권력의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평균 내어 보면 이 활동에 참여하고 있고, 또 정책을 만들었던 많은 사람들도 이 문제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룹들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러한 문제의식이 있음에도 정책의 수립과 전달과정에서 그리고 실제 현장에서의 실천 속에서 저자가 생각하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와 해결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자의 논의를 따라서 이후 글에서 더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케이스 스터디 : '생존자'를 위한 옹호 연구 결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