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를 통한 혁신 1
"2000년대 중반에 나는 운동을 좀 더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런던 시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컴퓨터로 일하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죠.
운동을 해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하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Good Gym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기분 좋게 만들고, 선행을 하기 쉽게 하며, 다른 사람을 볼 수 없는 노인들을 돕습니다."
- 이보 곰리의 인터뷰
지난 몇 년간 다양한 커뮤니티의 형태를 관찰하면서 눈에 들어온 한 커뮤니티의 유형이 있습니다. 바로 '러닝 크루'.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주 목적인 모임입니다. 전통적인 형태의 '동호회'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몇 가지 다른 특징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 In & Out이 편하다
많은 러닝 크루들이 일정을 공지하고 그 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기반으로 그날의 크루가 결성되는 형태의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더 정기적으로 멤버십을 가지고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구나 들어와서 참여할 수 있도록 보다 열린 구조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날 모인 사람들의 컨디션과 달리기 능력에 따라서 이들을 이끌어줄 페이스 메이커들이 적절한 속도로 달리기를 도와줍니다. 초보자도 쉽게 모임에 참여가능하고 혹여 다음 모임에 나오지 않더라도 부담은 없습니다. '들어오는 사람 막지 않고, 나가는 사람 잡지 않는' 느슨한 방식의 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2) 스타일리시한 라이프 스타일로서 러닝을 추구
최근에는 많은 운동들이 운동 그 자체의 목적 외에 나의 취향, 외모, 생활 능력 등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골프의 유행, 테니스의 유행 등이 그렇지요. 러닝도 그런 특성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시를 든 운동들 보다는 러닝 크루는 더 공동체 적이며 더 일상 속에서 스며드는 방식으로 이를 표현합니다. 내가 '러닝'을 얼마나 사랑하고 일상 속에서 '러너'로서의 정체성을 크루들과 공유하며 살고 있는지 인스타에 올리는 사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골프나 테니스와 같은 운동은 보통 상대가 있어야 성립하는 경기이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저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러닝크루들이 달리는 멋진 사진을 보면, 나도 왠지 저 사이에서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3) 자연, 환경, 봉사 등 활동과 연계
한창 유행과 같이 이뤄졌던 줍깅, 플로깅과 같은 활동들이 러닝 크루들의 활동과 이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달리는 길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장소가 안전하고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달리기는 그야말로 외부의 보호가 거의 없는 스포츠입니다. 별다른 보호가 없이 도로, 공기, 햇빛 등등의 조건이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면서 달려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로 달리는 천변이나 혹은 산길, 도로 곳곳을 청소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오프라인으로 실내가 아닌 야외 공간에서 대규모의 사람들이 모이는 활동이 크게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정기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러닝 크루의 존재는 특별합니다. 활동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요즘 세대들의 특징과도 연결이 되어 크루들이 자연보호의 홍보대사가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굿 짐(Good Gym)의 시작은 2008년 런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달리기를 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좋은 일'을 하도록 연결해 주는 활동입니다. 굿 짐을 처음 만든 이보 곰리(Ivo Gormley)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체육관에서 쏟는 에너지를 지역사회의 고립된 사람들이나 외로운 이들을 위해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우연히 알게 된 63세의 Terry라는 사람에게 신문을 가져다주는 활동을 했습니다. 63세 밖에 되지 않았지만 Terry는 이미 고립된 삶을 오래 살면서 점점 쇠약해져 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에게 신문을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곰리가 정기적으로 달릴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해 주었고, 이 관계가 지속되면서 서로에게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운동'이라는 좋은 일과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는 일'이라는 좋은 일을 연결할 수 없을까? 곰리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현재 2만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영국 전역의 58개 도시에 퍼져있는 굿 짐의 시작입니다.
굿 짐에 참여하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1) 그룹 달리기를 하면서 커뮤니티 작업에 참여하기 : 커뮤니티 작업은 헛간을 정리하기, 동네 공원을 가꾸기, 등 다양합니다.
2) 이웃 어르신 집에 뛰어서 방문하여 말 벗이 되어드리기
3) 이웃 어르신을 위한 미션을 수행 : 물건을 가져다 드리거나, 쓰레기를 버려드리기
굿 짐이라고 쓰인 붉은색 티셔츠는 이들에게 연대감과 소속감을 불어넣습니다. 함께 달리기를 하며 선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지속적으로 달리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며 우리가 가진 자원으로 우리 주변을 더 좋은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한 동력이 됩니다.
굿 짐이 이보 곰리라는 한 혁신가로부터 시작이 되었지만 그 역시 사회의 맥락과 동떨어져 갑작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활동의 시작과 발전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 문화적 맥락들을 간단히 짚어보려 합니다.
개인화되는 사회활동 : '볼링 얼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대표적 클럽 스포츠인 볼링을 혼자 치는 미국인이 증가하는 것을 통해 사회적 커뮤니티가 붕괴되는 현상을 설명한 책인데요. 사람들이 스스로 원해서 혼자 운동을 하게 된 것인지, 사회 문화적 상황이 혼자서 운동하는 사회를 만든 것인지. 무엇이 더 큰 영향을 준 것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독립적이고 싶지만 고립되고는 싶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사회활동이 개인화되더라도 '함께하는 활동', '사람을 만나는 일'의 만족감을 대체할 수 있는 일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는 반대급부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개인화되는 사회활동 속에서 연결을 찾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연결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합니다.
고령화 사회와 커뮤니티 케어 : 영국의 경우 고령화 율(65세 인구 비율)은 18%로 우리나라 보다 높지만 증가율은 완만한 편입니다. 다만 1990년대 고령자나 장애인 등 케어가 필요한 사람들이 시설이 아닌 자신이 살던 마을이나 가족들 사이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커뮤니티 케어가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지역 곳곳에 스스로 자립해 살아가는 노인과 장애인이 늘어났습니다. 런던은 75세 노인의 50%가 혼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정부는 '외로움'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외로움 부' (Ministry of Loneliness)가 있을 정도로 이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화는 다음과 같은 생각의 전환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외로움은 나이 든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사실 외로움의 사례로 고령자의 문제를 들기는 했지만 개인화되는 시대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노인만이 아닙니다. 외로움은 세대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죠. 오히려 이러한 공통적 유대가 서로 만나기 힘들었던 다른 세대들이 만나는 매개가 되고 연결 고리가 되었습니다.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이 굿 짐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건강은 신체적 능력과 관련한 문제만이 아니다
WHO(세계 보건기구)의 건강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건강(health)은 단순히 질병이나 장애가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양호(well-being) 한 상태" 단순히 몸이 건강해진다고 해서 건강한 생각과 행동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은 정서와 정신과 연결된 문제이고 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타적인 행동을 통한 자긍심, 행복감, 자존감의 증진이 도움이 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과시하기 위한 운동, 나 스스로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즐기고, 운동으로 얻은 에너지를 타인과 사회를 위해 활용할 때 더 큰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굿 짐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억지로 커뮤니티를 만들지 않는다
이런 좋은 활동을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확산시키면 좋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모임을 설립하고 가입자를 모으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굿 짐은 그러한 방식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부분은 마치 우리나라의 당근마켓의 초기 확산 과정을 보는 것 같은데요. 굿 짐의 활동을 확인하고 자신의 마을과 지역에서 이런 일들을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 공식적인 커뮤니티로 오픈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보다 강력한 커뮤니티의 원동력은 '자발성'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인데요. 가치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고,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서 이 활동을 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단체의 확장을 위해서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영국 전역에 58개 도시와 마을에서 20,000명이 굿 짐 커뮤니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5,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돕고 3,000개 지역사회 프로젝트 및 자선 단체에 에너지와 시간을 기부했습니다. 굿 짐 커뮤니티가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는 사람들 100%가! 자신이 더 행복해졌다고 표현했고 평균적인 삶의 만족도가 23% 향상되었습니다.
타인을 돕는 호혜적인 활동이 증가했습니다. 굿 짐 커뮤니티에 가입하기 전에는 봉사활동에 참여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61%였다고 합니다. 물론 굿 짐 회원들의 운동량도 증가했습니다. 주당 평균 20분이 증가하여 개인 및 지역의 건강증진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굿 짐이 빛난 것은 특히 코로나 상황을 맞이하면서입니다. 처음 코로나가 확산되었을 때는 굿 짐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고 합니다. 단체 활동이 제한되고 외부 활동에 제약을 받으면서 사람들의 참여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이겨낸 것은 사람들의 필요였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홀로 있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의 지원 요청이 10배 이상 증가하게 됩니다. 단체 활동보다는 개인적인 지원활동에 집중하면서 굿 짐은 오히려 더 큰 도약을 맞이하게 됩니다.
커뮤니티를 활용한 혁신 사례를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나오는 생각이 '젊은 사람들과 나이 든 분들을 연결해 주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남의 매개가 무엇이어야 할지, 그 두 세대가 왜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비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 젊은 사람들은 주는 사람 나이 든 분들은 받는 사람으로 구도가 설정되어서 한쪽이 일방적인 관계 맺기를 가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무감만 남아버린 생각 속의 아이디어는 실현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고요. 굿 짐은 보기에는 젊은 사람들의 봉사활동으로 보이지만 보다 근원적인 인간 본연의 특징에 집중합니다. 사람은 모두 관계적인 동물이고,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는 사실말입니다. 달리기는 좋은 매개가 되고 때로는 핑계가 됩니다. 우리도 우리의 맥락에 맞는 커뮤니티 활동, 커뮤니티 혁신의 사례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참조
굿 짐 홈페이지 (https://www.goodgym.org/)
허핑턴 포스트 (https://www.huffingtonpost.co.uk/ivo-gormley/combining-exercise-with-d_b_82629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