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를 통한 혁신 2
"취미 강좌도 중요하지만, 사실 '이야기하고 싶지만 주변에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배움의 주제가 있지 않을까. 가족, 커리어, 사회 문제 등에 대해 너무 가까운 커뮤니티가 아닌 시부야라는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2020년에 리뉴얼을 했다."
오자와 유키 _ 시부야대학 학장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한 번쯤 시부야 지역의 커다란 횡단보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교차로의 신호가 한 번에 바뀌고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건너는 장면은 그 자체로 장관입니다. 시부야는 도쿄의 가장 번화한 지역이자 백화점, 레스토랑, 쇼핑몰 등이 즐비한 상업지구입니다.
이러한 지역에서 커뮤니티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정주하는 사람도 적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기만 하는 지역에서 사람들이 연결되고 그 안에서 배움이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이 17년째 계속되고 있는 그곳. '시부야대학'입니다.
시부야대학의 시작은 시부야 구청의 욕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원래 구청 주도로 커뮤니티 교육을 진행하려 했지만 공공주도의 활동은 좀처럼 확산되기 어려웠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당시 하라주쿠를 중심으로 깨끗한 도시 만들기 활동을 하고 있던 'Green Bird'라는 NPO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사쿄 야스아키 씨입니다. 그는 NPO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연결하는 콘셉트로 새로운 제안을 제시했고 이 제안이 구청에 받아들여져서 시부야대학이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시부야대학의 특징은 정해진 캠퍼스 공간, 혹은 고정된 강의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쇼핑몰 내 어떤 공간, 시부야의 와인바 혹은 공원 안이 교실이 되곤 합니다. 고정된 커리큘럼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시부야대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부야대학은 '계기가 되는 학습'을 제공한다고. 무언가를 찾는 계기, 새로운 변화를 만드는 계기, 동료를 찾는 계기와 사회를 바꾸는 계기로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를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어떤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부야대학은 이 경계를 흐리고 느슨하게 함으로써 은행형의 적립식 교육이 아니라 서로 묻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깨닫는 자연스러운 배움의 과정을 설계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 시부야대학 홈페이지
1) 배움은 좀 더 느슨해도 좋다
전문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배움뿐만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배움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그래서 주제의 폭은 넓고 느슨하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도 배움이 된다. 그리고 천천히 느슨하게 배우면 된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페이스로 진행하면 된다.
2) 진지한 이야기도 하고 싶다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 자신의 의견도, 의문도, 고민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간다.
3) 같은 공간에서 누군가와 함께 배우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결되는 시대에 굳이 한 곳에 모여서 함께 배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싶다.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답, 생각, 의문에 함께라면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 모두가 함께 만든다
주어진 배움의 장이 아니라 모두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장이 되고 싶다. 기획도 운영도 사무국과 자원봉사자 모두가 함께 한다. 배움의 시간도 선생님과 학생이 함께 만들어 간다.
5)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
배우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배움의 장을 제공하기 위해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누구나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만날 수 없는 뜻밖의 발견과 만남이 이루어진다.
6) 마을 전체가 배움의 장으로 바뀐다
학교 건물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배움의 형태가 있다. 평소에 자주 가는 곳이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배움. 평소에 들어가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배움. 카페도, 백화점도, 공원도 배움의 장소로 바꾸면서 새로운 발견을 전달한다.
시부야대학의 홈페이지에 쓰여있는 시부야대학의 운영 방향을 나타내는 키워드와 설명들입니다. 곳곳에 흩어져서 각자의 방식으로 배움과 가르침이 일어나지만 이러한 방향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지역이 하나의 캠퍼스처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2) 진지한 이야기도 하고 싶다는 키워드입니다. 진지한 이야기가 밈처럼 혹은 조롱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단순히 어려운 이야기로서 진지함이 아니라 속 깊은 이야기, 배경과 맥락을 자세히 살펴가며 찬찬히 살펴가며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운 시대인 것은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최근 책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 사업이 활발한 것도 그러한 반대급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지하고 싶지만 안전하고 싶은 그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시부야는 이동인구가 정주인구의 3배를 넘는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누가 사는 사람이고 누가 방문하는 사람인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분을 굳이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정주하는 사람도 손님처럼, 방문하는 사람도 이곳이 익숙한 거주민처럼 각자 배움의 욕구와 가르침의 욕구만 가지고 대면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동인구를 시부야의 주민으로 보는 것이 시부야대학 첫걸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시부야에 출퇴근만 반복하던 2030 세대를 중심으로 원데이 클래스 등을 활성화해서 경제생활뿐 아니라 여가 생활까지 시부야에서 누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여기에는 시부야대학이 성장하던 당시에 일본의 2030 세대가 삶에 대해 가진 생각이 전환된 것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가장 큰 변화의 계기였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탐구하고, 안심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수요와 욕구가 늘어났습니다. 현재 2020년부터 새로운 학장으로 일하고 있는 오자와 유키가 겪은 일들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녀가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관광학과를 들어가게 되었고 이러한 비상의 시기에 관광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정치나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에 답답함을 느끼던 차에 유학길로 떠난 영국에서 대화와 토론에 대한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됩니다. 난민, 테러, 기후 등의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는 분위기를 일본에서도 이뤄보고 싶은 마음에 일본에서도 비슷한 활동을 기획해 진행했고, 안전한 장소가 만들어질 경우 일본의 어른들도 대화를 즐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벼운 동아리 활동이나 원데이 클래스가 이뤄지는 마을 강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시부야 대학의 원동력은 '시부야'가 '사회문화 변화의 거점'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을 나에 대한 이해와 자신을 돌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타인과의 대화와 배움을 통한 관계로 풀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부야대학에서는 '자신만의 아로마 오일'을 만드는 원데이 클래스와 '아나키즘'을 주제로 한 교수님의 강좌가 같은 층위에서 열릴 수 있습니다.
좀처럼 청년들이 모이는 집단적 모임을 찾기 힘들다는 기업들의 필요도 시부야대학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청년들이 새로운 소비자 층으로서 가까워지는 것이 필요한데 일부러 마케팅 비용을 들이는 것보다 시부야대학과 함께 콜라보하면서 자연스럽게 기업을 알리고 협력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Think College'라는 프로그램이 대표적입니다. 시부야에 위치한 세이부 백화점의 매장 공간을 강의실로 꾸며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사람들을 초청해 사람들과 함께 대화 나누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2012년 제3 국의 어린이 인신매매 문제를 다룬 강좌를 시작으로 공정무역이나 커뮤니티 디자인, 기업의 사회공헌 등에 이르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2020년까지도 연속적인 강좌를 진행했습니다.
이를 유치하고 진행한 시부야 백화점의 마케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케터로서 중요한 것은 고객의 행복에 대한 가치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3.11 이후, 다들 왠지 모르게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아직 구체적인 '무언가'는 없지만,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우리 공간에 만들면 어떨까 싶었어요
백화점이 그 '무언가'를 제공하겠습니다! 가 아니라, 그저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나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무언가를 느끼고, 경우에 따라서는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자리를 만들 수 없을까요?라고 시부야대학 측에 문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업과의 제휴, 행정의 도움, 개인 기부 등이 모여서 시부야대학은 수업료 무료의 구조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시부야대학은 현재까지 400개 이상의 장소에서 1,400개 이상의 강좌에 36,000명 이상이 참가했습니다. 자원봉사자만 450여 명에 이르고 지난 17년간 활동을 끊임없이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부야대학이 남긴 임팩트 중에 가장 큰 것을 고르라면 유사한 프로그램의 복제 사례를 많이 남겼다는 것입니다. 마을을 배경으로 한 경계 없는 학교,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경계를 넘어오고 갈 수 있는 평생학습의 모델은 일본 내는 물론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2년 대한민국 평생학습 특별상을 수상한 수원 평생학습관(현 수원글로벌평생학습관)의 '누구나 학교'는 시부야대학과 유사하게 마을 주민이 강사가 되어 수업을 개설하고 가르치며 또 배울 수 있는 평생학습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본래 수원평생학습관 내에서 운영되던 것을 이후에는 아파트, 지역단체, 도서관 등에서 개설하고 진행할 수 있게 해서 진정한 마을의 공동체 학습 모델로서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현재에도 '누구나 학교'의 모델은 다양한 지자체에서 유사한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변화들의 시작에 시부야대학의 모델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육은 그만한 자격을 가진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을 위해서는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특정한 장소가 필요하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시부야대학은 17년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도시의 특성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이동하는 사람들' 그것이 도시의 특성입니다. 그 안에서 관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고정된 실체들에 매이고 묶여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짧은 만남을 위기로 여기지 말고 기회로 여기며 독특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관심사를 묶어서 모으려 하지 않고 펼쳐서 서로가 스스로 이어 보게 한다면 순간적이지만 역동적인, 움직이지만 감각할 수 있는 도시의 커뮤니티가 만들어 질지도 모릅니다.
*참조
시부야대학 홈페이지 (https://www.shibuya-univ.net/)
그린즈 기사 (https://greenz.jp/2013/09/30/shibuya_seibu/)
오자와 유키 인터뷰 (https://toyokeizai.net/articles/-/512292)
희망제작소 기사 (https://www.makehope.org/?p=3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