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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 Jun 15. 2020

제네바_재택근무 3달 차



   2020년 5월 20일. 만약 코로나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고, 짐을 챙기고, 이웃집 스위스 부부에게 한국을 가니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타는 한국행 비행기를 생각하면서 은근히 설레어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비행기가 취소되고, 휴가도 취소되고, 재택근무는 계속되고, 한국 갈 날이 기약 없어지니 코로나가 우리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내가 일하는 단체는 코로나 이전에도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사실 제네바는 큰 도시가 아니고 우리 집에서 사무실까지도 트램으로 20분, 걸어서 30분 거리이다. 서울 같은 교통 체증도 없고,  러시아워라고 해도 지옥철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매니저는 재택근무에 호의적인 사람이고, 본인 스스로 앞장서서 1주일에 최소 1일은 재택근무를 해왔고, 재택근무 요청에 대해서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승인해주었다. 나는 업무와 사생활의 구별이 중요하게 생각되어서 그리고  짧은 컨설턴트 업무 기간 동안 혼자 일하는 게 힘들어서 재택근무를  선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읽어야 할 리포트가 많거나 집중해서 해야 할 프로젝트가 있는 경우에는 가끔씩 집에서 일을 하곤 했다. 동료들 사이에선 늦게까지 잠을 잘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서 재택근무는 ' PJ day' - 파자마 데이-라고 불렸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재택근무는 생각보다 장점이 많다. 

8시까지 침대에서 뒹굴어도 되고, 오후에 슈퍼에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틈을 노려 잠깐 슈퍼를 갔다 와도 되고 오전에 짬을 내서 세탁기를 돌리거나 욕실 청소를 할 수도 있고, 딴짓하면 안 되지만 간간히 딴짓도 할 수 있고 말이다. 참석해야 하는 미팅이나 인터뷰를 빼고는 아침에 일찍 시작하고 오후에 일찍 끝내는, 유연근무제도 나 스스로 정할 수 있다. 물가 비싼 제네바에서 점심 도시락을 싸는 게 은근히 스트레스였는데, 지금은 일하다가도 어제 끓인 김치찌개를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업무시간도 잘 살펴보니, 사무실에서 일할 때보다 오히려 일이 빨리 끝난다. (물론 이건 내 업무가 코로나 영향을 받아서 줄어든 것도 있지만, 사무실에 있다 보면 여러 가지 잡담을 하는 경우가 있고 또 여러 사람이 함께 있어서 업무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처음에 '강제로'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을 때는 평소에는 작고 소중한 내 아파트가 너무 좁고 공간 구분도 안되고 발코니나 정원도 없어서 끔찍하게 느껴졌다. 스위스에 화장지 대란이 벌어졌을 때, 우습지만 매일 24시간 화장실을 사용하는데 화장지가 떨어지고 슈퍼에는 화장지가 없어서 재택근무를 원망하기도 했다. 동료들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혼자 중얼대는 나를 보고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재택근무가 주는 편안함에 다시 5일 내내 출근하는 일상으로 돌아가면 스트레스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우리 단체는 현재 점진적으로 사무실에 출근을 하는데, 매일은 아니고 또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선택사항이다.  나는 6월부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사무실에 가서 팀 미팅에 참석하고- 물론 모든 팀원이 오는 건 아니라서 역시 화상 미팅이다- 서류를 받거나 정리를 한다. 물론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되지만,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일하는 것도 이상해서 잠깐 가서 반나절 정도 있다 집으로 와서 다시 일을 한다. 


   사실 재택근무 3달 차가 넘은 지금은, 거의 모든 일들이 재택근무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리적으로 꼭 한 공간에 있어야 하고, 꼭 얼굴을 마주 보고 침 튀겨가면서 회의를 하거나 인터뷰를 하지 않더라도 해야 할 일은 돌아간다.  유선전화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미팅들도 스카이프나 줌을 사용하니 공짜로 할 수 있다.  프린트하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늘 중요한 서류는 프린트를 해서 연필로 줄 그어가며 읽던 게 버릇이 된 나이다. 재택근무를 처음 시작할 때는 프린터가 없다는 게 큰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프린트 안 하고  화면에서 읽는 것도 익숙해지니 신기한 일이다. 환경을 생각하면 프린트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혼자 있다 보니 주변과 고립되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지난주에는 한 동료의 5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있어서 오랜만에 많은(그래 봤자 10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을 만나고, 잘 안 쓰던 불어를 쓰려니 좋고 반갑긴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피곤했다. 일은 일이지만,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적다 보니 내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 가끔은 헷갈릴 때도 있다. 스위스에 살고 있지만, 이 동네와는 별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나만의 섬에 산다고 해야 하나? 또 재택근무가 계속된다면 시차만 맞출 수 있다면 내가 굳이 제네바에서 살 이유도 없다. 


코로나가 많은 것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기대와 우려 모두가 공존하는데 나는 기대를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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