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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을로

딸아이가 온다

by 파란하늘

“물을 더 사놔야 할까?, 얘가 물을 많이 먹잖아, 신기하지, 걔는 하루에 한 통은 다 마셔, 큰 거 한 통을 아예 안고 살아!”

유럽에 워홀 간 딸아이가 다음 주에 온다. 크로아티아는 겨울에 비수기라서 이맘때부터 2월까지 게스트하우스 문을 닫는단다. 한인게스트하우스에서 무보수 숙식 제공에 3일 일하고 4일 쉬는 동안 유럽 이곳저곳을 다니며 살던 딸이 머물 곳이 없어진 것이다. 이참에 한국 들어왔다가 게스트하우스가 다시 문을 여는 2월에 다시 갈 거란다.

11월 말에 부산 집 이사를 앞두고 있다. 이삿짐을 줄이고자 집 정리 중이다. 식재료도 따로 사지 않고 냉장고 파먹기를 하고 있다. 사다 놓은 생수가 마침맞게 있어 따로 안 사도 되겠다 싶었는데 딸아이가 온다 하니 남편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딸 온다니 좋지?”

평소보다 수다스러워진 남편을 보며 물었다.

“당연히 좋지, 근데 귀찮은 것도 있어. 걔는 아빠 리모컨이야”


남편은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응답하라 1988에서 택이가 좋아하는 덕선이에게 이것저것 시키듯, 남편은 내게 이것저것 시킨다. 목이 마르다, 등이 가렵다는 말이 리모컨처럼, 나는 어느새 남편에게 물을 떠다 주고, 등을 긁고 있다. 그는 자기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내가 해주기를 바란다. 내가 좋아서 하는 짓이다. 서로 심리적으로 불편할 때는 내게 시키는 대신 자기가 직접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나에게 해달라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아니까 그대로 받아주며 여태껏 살았다.


몇 년 전 남편이 부산으로 발령을 받아 살게 되자 호주 워홀에서 돌아온 딸아이는 통영 대신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딸아이는 모든 면에서 아빠를 닮아 손이 많이 간다. 신기하게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해주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부탁의 어조이거나 때로는 혼잣말 같은데, 주변의 사람들은 웬만하면 아이의 뜻대로 움직이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도 능력이려나. 다른 사람도 그런데 딸바보 아빠는 오죽하랴.


“걔가 그런 면이 있지, 걘 어릴 때부터 그랬어. 지 이모들이랑 놀 때도 지가 대장이었으니까”

그랬다. 아버지와 둘째 이후로 결혼이 많이 늦어져서 셋째와 고모네 사촌 동생들은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딸아이가 내 사촌 동생들과 같이 놀 때 면 동생들은 딸아이의 진두지휘 아래 딸아이의 뜻대로 놀이를 하곤 했다.


“어쩔 수 없지, 당신이 나한테나 갑이지 걔한텐 을이잖아”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 그런지 대꾸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더 좋아하는 사람이 을일 수밖에 없다. 남편이 딸아이에게 을이듯, 나는 남편에게 언제나 을이다. 이번 생은 그렇게 살아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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