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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 수집가 Feb 01. 2021

시장에는 무포장 애호박이 있다

신입 제로웨이스터의 일기장




요즘 내 생활패턴에서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마트' 안 가기다. 솔직히 살림을 꾸리는 주부 입장에서 마트를 아예 안 갈 순 없다. 우리 집에는 밥 먹을 때에도 우유와 먹는, 신기한 식습관의 우유 러버 남편도 있고, 2-3주면 동이 나는 계란도 사야 하고, 지구 대재앙인 그날이 다가올 때면 달달한 간식도 씹어야 하니까. 집에서 젖소나 닭을 키우는 것도 아니고, 요즘 같은 시대에 마트를 어찌 뚝 끊겠는가 -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트 안 가기' 보다는 '마트를 안 가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기' 가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근래에 분리수거하는 방법, 잘 버리는 방법에 대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우리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분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식품류에서 굉장한 비닐과 플라스틱이 나오고 있었는데, 문제는 마트, 더 정확하게는 마트에서의 내 '소비습관' 이 원인이었다.






일단 나는 마트에 가면 제어가 안된다. 평소 운동량이 적어서 장 보러 가는 날을 '걷기 운동하는 날' 이라고 생각하는데, 최대한 많이 걷기 위해 마트 입구에서부터 계산대까지 구석구석 발 도장을 찍으며 간다. 그러다 보니 구매 목록에 없었던 것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오고, 세일 품목이 자꾸만 나를 반기고. 어느새 카트에는 필요한 것보다 불필요한 것들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때쯤 되면 가격을 두들겨보는데, 2만 원 중후반대가 나오면 억지로 물건을 더 사서라도 3만 원을 채운다. 3만 원이 넘으면 무료배송이니까!



장 보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영수증을 펼치고 가계부를 두들긴다. 한 팩에 2,570 원하는 우유를 2묶음에 3,980원으로 샀으니 1,410원이나 아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재료지만 50% 세일 가격에 사 왔으니 이게 웬 횡재냐! 야무지게 3만 원 딱 채워서 배송까지 시켰더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저 가뿐했다. 그동안은 이런 내가 현명하고 지혜로운 소비자이자 알뜰살뜰한 주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 2묶음으로 사 왔던 우유 중 하나는 유통기한이 훨씬 지나버려 뜯지도 않은 새 우유를 하수구에 흘려보내야 했고, 냉장고 속 야채들은 불필요하게 많아 이미 절반은 썩어가고 있었다. 알뜰한 주부라고 자신했던 나의 장 보는 소비패턴은 과소비였으며, 결국 쓰레기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트를 끊기로 했다. 마트로 향하던 발길과 눈길을 시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완벽한 '쓰레기 없이 장보기' 를 실천하게 되었다.





며칠 전부터 남편이 그렇게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바지락. 사실 그동안에는 마켓컬리에서 파는 왕 바지락만 사 먹었다. 1kg에 9,300원이라는 가격이 조금 비싸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받아보면 이름처럼 왕 큰 바지락이었기에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바지락이 전부 죽어서 오고, 열었을 때 비린내가 엄청 심한 불만족스러운 상황들이 생겨났다. 그러던 와중에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게 되어 마켓컬리 이용을 잠시 안 하는 중인데, 불만족스러웠던 기억에도 불구하고 이 바지락이 제일 아른거렸다.



솔직히 시장에서는 해산물을 사본 적이 없다. 뭔가 밖에 꺼내져 있다는 것도 그렇고,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비린내도 심할 것 같았다. 유독 해산물 비린내에 예민한 나는 '시장 해산물은 그럴 거야' 하고 지레짐작하며 한 번도 구매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뜨거운 사랑은 비린내를 이긴다고 했던가 - 남편의 "바지락 먹고 싶다... 바지락..." 이 한마디에 어느새 나는 시장 생선가게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중 유독 조개류가 많은 가게가 있었는데 아니, 바지락 가격이 1kg에 4,000원이라고? 나는 그동안 만원 가까이 주고 사 먹었는데?



살까 말까 고민하는 나를 발견한 사장님께서 "아가씨~ 뭐 드려~?" 하고 높은 목소리로 반기셨다. 얼떨결에 아가씨가 된 나는 손에 든 밀폐용기를 보이며 "혹시 여기에 바지락이 전부 담길까요?" 하고 물었다. 밀폐용기를 이리저리 살피시더니 "꽉꽉 눌러봐야제~" 라며 정성스레 담아주신다. 저울에 정확히 무게도 측정하시는 모습에 '아, 시장 생선가게도 믿음직스럽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아가씨' 라는 호칭에 마음이 혹했던 건 아니다. 그저 싱싱한 바지락을 밀폐용기에 테이크 아웃할 수 있다는 게 좋았을 뿐이다.



해산물을 밀폐용기에 구매하면 좋은 점 하나 - 물에 젖은 비닐도 나오지 않을뿐더러, 따로 옮길 필요 없이 사온 그대로 해감해서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 편하게 해감을 하는데, 물까지 찍찍 내뱉으면서 끝까지 살아있는 바지락을 보고 그동안 시장 해산물을 오해했구나 싶었다.





시장에는 해산물뿐만 아니라 양파나 감자, 고구마, 제철 식재료 등 대부분이 포장 없이 진열되어있다. 양파망이나 비닐에 담겨있는 마트 양파와는 달리, 시장에서는 이렇게 비닐 없이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가게마다 달라서 투명한 비닐에 담겨있는 곳도 많다. 그래서 늘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걸어가며 여기저기 눈도장을 찍어놓는다. 



'양파는 여기서, 감자는 저기서 사야겠군!'





그렇게 여기저기 눈도장을 찍던 와중에 포장재 없는 애호박을 발견했다. 처음엔 오이인가 싶었다. 자세히 보니 정말 애호박인 거다! 순간 진심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그동안 애호박의 비닐 포장과 빵 끈 세트는 절대불변의 포장 공식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 내 눈 앞에 그 어떤 포장도 없이, 날 것 그대로인 애호박이 있는 거다.



겉면에 상처가 좀 있긴 했지만 뭐 어때, 말끔한 호박이나 상처 난 호박이나 어차피 뚝딱뚝딱 썰어서 요리하는 건 똑같은데 - 우리나라는 유독 식재료의 흠집이나 상처에 엄격하다고 한다. 상처 난 사과는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버려지고, 마트의 흠집 있는 감자나 고구마, 당근은 선택받지 못한 채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먹는데 아무런 지장도 없는 조그마한 상처는 버려지는 식재료에게도, 키워낸 지구의 땅에게도 상처로 남는다.



종종 상처 난 식재료를 데려와 근사한 요리로 변신시킨다. 접시 위에 담긴 요리는 맛에서도 모양새에서도 그 어떤 흠집과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시장에서만 장을 보니까 불필요한 과소비도, 버려지는 포장재도 안 나온다. 무거워서 그만큼 사 오지를 못하다 보니 시장에서는 정말 필요한 것만 사게 된다. 이것저것 다 샀다가는 뚜벅이인 나의 어깨가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고르고 골라 꼭 필요한 재료들만 간소하게 산다. 덩달아 아깝게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와 식비도 줄었다. 냉장고에서 식재료가 넘치다 못해 썩어가는 상황이 사라지니 '이거 빨리 먹어치워야 하는데' '아이고 이거 썩어가네 빨리 먹어야겠다' 하는, 억지로 먹어 치워야 하는 상황이 안 생겨서 너무 좋다. 우리의 몸은 버리기 아까운 음식들로 채워지는 '음식물 쓰레기통' 이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포장재 없는 애호박을 파는 시장이라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 물론 우유가 똑 떨어지면 마트에 가야겠지만 그럴 땐 필요한 것만 딱딱 사서 나오겠노라 다짐한다.



2020. 5. 22. F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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