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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 수집가 Feb 01. 2021

제로 웨이스트 대실패의 날

신입 제로웨이스터의 일기장






제로 웨이스트를 시작하게 된 날부터 블로그에 꾸준히 나의 제로 웨이스트 일상을 기록해왔다. 그때마다 많은 분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와 응원을 받아왔다. 서로 얼굴도 누군지도 잘 모르지만, 그저 '환경' 이라는 공통된 관심사 하나로 대동 단결하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대단하다" "어떻게 매번 그렇게 하냐" 며 감사한 댓글들을 남겨주시는데, 사실 그럴 때마다 굉장히 부끄러웠다.



포토샵으로 잘 나온 사진만 잘라내듯, 나 역시 실패로 범벅된 일상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순간만을 보기 좋게 포장했을 뿐인데 말이다.



"사실은 저도 이렇게 쓰레기를 잔뜩 사 오는 날이 있어요."






지난 금요일에는 산부인과 검진에서 자궁 내막이 4mm로 너무 얇아 착상이 어려울 수 있다는 소견을 들었다. 오늘, 뒤늦게 날아온 자궁경부암 검사에서는 심한 염증으로 인한 반응성 세포 변화가 보이며, 자궁경부 확대 촬영술 결과 병변이 있어 추적 검사가 필요하다는 연락까지 받았다. 심장이 쿵 - 하며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좋다는 음식은 다 검색했던 것 같다. 때마침 롯데마트에서 아보카도가 반값 세일 중이라는 말에 씻지도 않고 달려갔다. 분명 아보카도만 사 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소고기가 40% 할인을 하시는 거다.



착상기에 소고기 먹으면 좋다던데, 40% 할인이면 거의 반값인데 하는 마음에 홀리듯 한 팩을 집었다. 돌아서 나오는데 "프라임급 이 가격에 잘 안 나옵니다~ 세일할 때 쟁여놓으세요~" 라며 유혹의 멘트가 마이크를 뚫고 내 고막을 강타했다. 나는 또 홀리듯 한 팩을 더 집었고, 두 팩에 만 오천 원이면 홀릴만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 내가 싫었다. 시장에서 샀더라면 포장 쓰레기는 안 나왔을 텐데. 후회할 걸 알면서도 세일 앞에서는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전복은 늘 시장에서 밀폐용기에 사 왔었다. 굳이 마트에서 사지 않아도 되는 식재료였다. 시장에서 6마리에 만 원이던 전복이, 마트에서는 8마리에 만 원이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핑계야 늘 많다. 핑계는 그래서 핑계다.



"~ 어디서 떡 같은"





진짜 엄청 오랜만에 간 마트는 신세계였다. 한동안 일회용 포장 쓰레기와 과소비를 막기 위해, 양손 가득 어깨 무겁게 낑낑거리며 시장에서 장을 봐왔는데. 시장에서는 팔지 않는 아보카도를 사기 위해 갔던 마트는 너무나도 쾌적했으며, 카트 덕분에 손과 어깨가 너무나도 편안했다. 온갖 세일 상품들은 순식간에 나를 현혹시켰고, 구경거리는 또 왜 그렇게 많은 건지 누가 보면 시골 촌뜨기로 봤을 거다.



심지어 16,500원이던 오징어가 포인트 적립만 하면 50% 할인 가격에 판매 중이었다. 큼직한 비닐 속 오징어는 사실 필요한 식재료는 아니었다. '50% 할인' 이라는 달콤한 상술에 현혹되어 환경을 잊은 자의 안타까운 전리품에 불과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마트를 몇 바퀴나 돌며 "와 역시 마트가 좋구나 좋아" 하고 있었다. 자제력을 잃은 탓에 이날의 장 보기에서는 스티로폼 4개와 비닐 랩 4개가 나오고 말았다. 후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오늘은 어쩔 수 없었잖아' 라며 정당화하는 내가 어이없다. 그래서, 반성하는 의미로 오늘의 실패를 기록한다.



대형마트에서는 쓰레기 없이 구매한다는 게 불가능한 걸까? 포장된 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탓에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새삼 시장이 있는 동네에 산다는 게 참 복 받은 거구나 싶다. 내일은 다시 또 환경 사랑꾼으로 돌아가 오늘의 실패를 만회해야지.



"아보카도. 분명 너만 사 올 계획이었다구"



2020. 7. 5.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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