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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 수집가 Mar 16. 2021

유리병 살림

신입제로웨이스터의일기장







우리 집 주방 수납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의 살림살이 보물 1호인 각종 유리병들. 함께한 세월이 10년이나 된 유리병도 있고, 나의 첫 살림을 함께 시작한 푸릇푸릇 한 유리병도 있다. 누군가 직접 만든 과일청을 담아 선물했던 유리병도, 아주 잠시였지만 채식을 하던 시절 - 샐러드의 짭조름한 맛을 담당해 주던 올리브가 담긴 유리병까지. 병 깊숙이 나의 기억과 추억이 담겨있다.



처음부터 유리병을 모았던 건 아니다. 진하게 벤 소스 냄새 때문에, 끈적하게 남은 스티커 자국 때문에,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다 먹었으니 너의 수명은 다하였노라' 하며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병들이 훨씬 많았다. 심지어 멋모르는 초보 새댁 시절에는 토마토소스가 그대로 남아있는 병을 씻지도 않고 그냥 버렸던 날도 있었더랬다.



아는 만큼 실천할 수 있다고, 한동안 환경에 대한 이런저런 책들을 읽었는데 그중 <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 라는 책을 읽고 '유리'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 새삼 유리가 예뻐 보였다고 할까?




플라스틱은 세상에서 가장 재활용하기 힘든 재질이다. 수혈도 같은 혈액형끼리 가능하듯 재활용도 무조건 종류가 같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플라스틱만 해도 약 70종이고, 그중 재활용 선별장에서 처리되는 종류가 약 10여 종, 나머지는 버려진다.
(중략) 그에 비하면 유리나 알루미늄이나 캔은 얼마나 심플한가. 그래서 무색 갈색 녹색으로 색깔만 맞춰 분리수거하면 재활용이 된다.
-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中 -



이 책을 읽은 후로, 되도록이면 플라스틱에 담긴 식재료보다는 유리병에 담긴 식재료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분리배출도 훨씬 간단하고 무엇보다 재사용하기에도 좋을 것 같아서다. 아직까지는 시중에 판매 중인 제품들 대부분이 플라스틱에 담겨있다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책을 덮으며. 모양이 예뻐서, 뚜껑이 예뻐서, 갖고 있으면 언젠가 쓸 것 같아서 고이 모셔뒀던 유리병들을 전부 꺼냈다. 언젠가 쓸 것 같았던 그 '언젠가' 는 바로 오늘이다. 그렇게 유리병 살림을 시작한 지 몇 달 - 냉장고는 더 깨끗해졌고, 살림은 더 즐거워졌다.



요즘 나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제일 아끼는 유리병




요즘 포도주스를 즐겨 마시는 중이라 마트에 가면 꼭 한 병씩 사 오게 된다. 사 오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건 아마도 페트병에 들어있다는 것 때문이었겠지? 그러다 우연히 홈플러스 음료 코너의 맨 밑바닥, 진짜 밑바닥 구석탱이에서 쭈그리고 있는 이 포도주스를 발견한 거다.



물 한 방울 안 들어간 국내산 포도즙 주스인데, 먹어보면 '아 진짜 100% 포도즙이구나' 하는 맛. 심지어 유리병에 담긴 주스라니! 라벨 스티커도 깨끗하게 떨어지고, 모양도 예뻐서 지금은 물병으로 사용하는 중이다. 뭔가 어릴 적 옆집의 보리차 맛 비결이었던, 델몬트 감성을 떠올리게 해 나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다.





이건 토마토소스 병이었는데, 뚜껑까지 냄새가 진하게 베어 처음 몇 번은 그냥 버렸던 걸로 기억한다. 곡선이 예쁜 병이라 어떻게든 써보고 싶은 마음에, 검색창에 '유리병 냄새 제거' '유리병 냄새 빼는 법' 을 엄청 검색하게 했던 놈이기도 하다.



검색창에는 모르는 게 없는 프로 살림꾼들이 천지 삐까리다. 프로 살림꾼들의 도움을 받아, 쌀뜨물에 하루 이틀 푹 담가놓고 베이킹소다 넣어 팍팍 흔들어 씻은 뒤, 햇볕에 말렸더니 신기하게도 냄새가 싹 사라졌다. 역시 모를 땐 무조건 검색창이다, 검색창!



길쭉한 모양이어서 야채 스틱을 보관하기도 하고, 종종 과일청을 담그기도, 소프넛 (나무에서 자라는 천연 세제 열매) 을 넣고 마구 흔들어 거품 만들 때에도 사용하는 활용도 좋은 병이다.





짧았던 채식 생활을 함께했던 올리브 병. 치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정말 짧게 끝났다고 한다. 주로 장아찌나 소분 용기로 사용하는데, 지금은 나의 첫 매실 장아찌가 담겨있다. 숙성될수록 점점 맛이 들어가는 고추장 매실 장아찌 -



항아리를 닮은 투박한 유리병에 매실 장아찌를 꾹꾹 눌러 담아 엄마에게 처음 전하던 날. 30년 만에 처음, 엄마가 매실 장아찌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남편 입맛과 시부모님 입맛은 기가 막히게 체크해놓으면서 정작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선 아는 게 없는, 그런 못난 딸이었다.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30년 치 미안한 마음까지 가득 눌러 담았을 텐데.





예전에 일했던 학원 옆에는 작은 카페가 있었다. 수제청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는데, 학원과 가깝게 있다 보니 종종 학부모님들로부터 수제청을 선물 받기도 했다. 다 먹은 병은 버리기 아쉬워 자잘한 소품을 담는 용도로 사용해왔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의 신혼집까지 오게 된 유리병이다. 깨끗하게 씻어 다시 카페에 가져다 드렸으면 재사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이 유리병에는 해외여행에서 사 온 초콜릿으로 다시 채워져 있다. 저 초콜릿으로 말하자면, 돌아오는 공항 면세점에서 '남은 돈은 무조건 다 쓰고 가야지!' 라고 주장하는 나와, '살게 없는데 뭐하러! 보관해놨다가 다음 여행에서 쓰면 되지!' 라고 주장하는 남편 사이에서 결국 나의 승리로 꾸역꾸역 샀던 초콜릿이다. 먹지도 않을 거 두 봉지나 산다고 엄청 혼났었다. 근데 진짜 안 먹어서 괜히 찔리게 만드는... (왠지 유통기한도 지났을 것 같다)



그저 유리병일 뿐인데 참 많은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유리병은 소분하기 좋아서 곡식이나 그래놀라 보관에 딱이다. 보통 이런 식재료는 지퍼백이나 비닐에 담겨 판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완벽하게 밀폐가 되지 않으면 벌레가 생기기도, 눅눅해지기도 한다. 유리병은 완벽하게 밀폐가 되니까 이런 걱정이 없어 좋다. 무엇보다 주방에 쪼르르 세워두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특히 이렇게 작은 병에는 애매하게 남은 식재료를 담아두면 귀여워 죽을 것만 같다.



첫 번째 유리병은 신혼 초기에 온라인 쇼핑몰에서 샀던 라즈베리 잼인데, 사랑스러운 뚜껑 때문에 3년을 못 버리고 있다가 이제서야 빛을 발하는 중이다. 유리병들은 뚜껑만 모아놓고 봐도 꽤 멋스럽고 예쁘다.





요즘 유리병에 마시는 커피 맛에 푹 빠져있다. 컨디션에 따라 커다란 유리병에 마시기도, 조그마한 유리병에 마시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투박한 유리병에 마시기도, 부드러운 곡선이 들어간 유리병에 마시기도 한다. 예민하고 스트레스 받은 날에는 손에 닿는 곡선의 느낌이 기분을 좋아지게 한다. 나만의 소소한 유리병 테라피다.



재사용되기를 기다리는 유리병 친구들과


곧 무언가로 채워질 친구들



'재사용' 은 사전적 의미로, 이미 사용된 물건을 다시 쓰는 것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재활용과도 비슷하지만 특별한 가공을 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재사용은 말 그대로 친환경적인 용어이자 행위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재사용의 범위를 넓혀가려 한다.



"궁극의 친환경 고수를 꿈꾸며 내일도 유리병 살림, 유리병 테라피."



2020. 8. 25. 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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