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부르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했다. 이는 인간이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있어도 그 개인이 유일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하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카네기 기술 연구소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재정적 성공을 거둔 사람 중 15퍼센트는 자신의 기술적 지식에 의한 것이고, 85퍼센트 정도는 인간 조종술, 즉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 덕분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했다. 그만큼 인간으로서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는 개인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공동체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많은 발전을 이룬 데는 모두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만일 인간이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간다면, 다른 동물들처럼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처럼 생존과 관련된 것 외에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아마도 문명의 발전 없이 매우 원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이처럼, 문명사회에서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 인간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그것이 이득이 될 수도 있고, 한 편으로는 해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게는 ‘인간관계’가 수험생활의 성공과 실패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처럼, 지나친 인간관계에 대한 에너지 소비는 실패의 요인으로 작용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 주변의 ‘인간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큰 노력과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인간관계 때문에 실패하는 수험생활과 관련된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너무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이 있고, 두 번째는 인간관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남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요구하고, 때로는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 일명, ‘관종(관심종자)’의 한 부류다. 후자는 주변 사람들과 아무런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자신이 할 일만 한다. 오히려 ‘인간관계’ 맺는 것을 시간만 낭비하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믿는다.
우선 전자의 사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켜보면, 유독 다른 사람의 시선에 영향을 많이 받는 학생이 있다. 수업 시간에도 자기가 먼저 발표를 해야 하고, 다른 활동에서도 자신이 인정받는 상황이 되기를 바란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아직 풀지 않은 문제집에 모두 맞은 것처럼 동그라미로 채점을 한 후에 문제를 푸는 모습도 보인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한테 자신이 문제를 틀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그 학생은 주변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고려해야 할 요소도 많아지고 행동에도 불편함이 따른다. 게다가 이런 행동으로 인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에 따르면, “인간성에 있어서 가장 심오한 원칙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인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서도 “자신이 중요하다는 느낌에 대한 욕구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가장 큰 차이 중의 하나다.”라고 했다. 즉, 인간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미국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의 ‘욕구위계이론’에서도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와 같은 '원초적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으로 사회적 욕구와 존경의 욕구와 같은 '심리적 욕구'가 생긴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매슬로우의 ‘욕구위계이론’ 중에 '심리적 욕구'다.
심리적인 욕구는 인간만이 충족시키고 싶어 하는 욕구다. 3단계에 해당하는 사회적 욕구는 다른 말로는 ‘사랑과 소속감의 욕구’라고도 한다. 이는 한 연구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다. 하버드 대학에서 남자 724명을 대상으로 75년 동안 인간의 행복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 종단연구(사람의 생애 발달 추세를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연구 방법)를 실시했다.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우리는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4단계에 해당하는 존경의 욕구는 ‘존중의 욕구’라고도 한다. 3단계 욕구가 충족되면 나타난다. 즉, 남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넘어서서 존경해주길 원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자아존중감(self-esteem)’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아존중감’은 사랑을 받을만한 존재라는 느낌, 혹은 능력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다. 따라서, 인간은 사랑과 소속감에 이어 존중까지 바라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이와 비슷한 현상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내가 남에게 존중받으려면 내가 먼저 존중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명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현상이 나이가 들어서도 나타나면, ‘착한 아이 증후군’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다. 즉, 타인에게 착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자신의 소망이나 욕구를 억압하면서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학창 시절 줄곧 별명이 ‘바른생활 사나이’였다. 남들에게 항상 반듯해 보이려고 했다. 고등학교 때 성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니 그런 부분에서 인정받고 싶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챙겨서 가지고 다니며 빌려주기도 했다. 누군가한테 부탁받으면, 거절하지 못했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고3이라는 시기에, 한 친구가 방학 때 낮에 자습 안 하고, 영화 보러 가자고 하면 같이 갔고, PC방에 가자고 하면 같이 게임을 하러 간 적이 있다. 사실 나는 영화가 보고 싶지도 않았고, 게임이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친한 친구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아서 혹은 나는 ‘착한 친구’, ‘고마운 친구’라고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했다.
심리학자 한스 셀리에는 “우리는 칭찬을 갈망하는 것만큼이나 비난을 두려워한다.”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그때의 나의 행동은 칭찬을 갈망했을 수도 있지만, 친구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행동이었다. 그만큼 청소년기에는 교우 관계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춘기 때는 부모의 말보다, 친구들의 말을 더 잘 듣는 경향이 있다. 여러 심리학 및 교육학적인 이론에 따르면, 청소년기에는 자신들이 겪는 변화와 갈등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우정이 형성되고 마음의 안정감을 얻는다고 한다. 또한, 친구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인식하고 친구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자아정체성을 발달시킨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자로 유명한 에릭 에릭슨의 ‘성격 발달 이론’에 따르면, 청소년기(12세~18세)에 겪는 갈등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이라고 했다. 이 시기에 부모와 선생님, 친구들과 원만히 잘 지내고,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잘 지낸다면, 자아정체성이 확고해서 정상적인 사회화가 가능하다고 한다. 반대의 경우에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혼란이 와서 ‘역할 혼란’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렇게 ‘자아’를 형성하는 시기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이 ‘인간관계’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사회화’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도록 연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너무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며 ‘인간관계’에 에너지를 쏟아서 손해를 보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도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 학교에서 보면,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학생이 있다. 그래도 명분이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고3 수험생 생활을 하고 있으니, 자신은 공부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밥도 혼자 먹고, 아이들과 대화도 하지 않고, 오롯이 공부만 한다. 심지어 수시 전형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으니, 일명 ‘정시파’라고 하며 수업 시간에 선생님 수업도 거부하는 학생도 있다. 고3 때 수업은 대부분 수능 관련 교재로 수능을 목표로 하는 수업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려고 한다. 참 안타깝다.
이런 학생 중에 그래도 교사와 상담을 통해 타협하여,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최대한 조화롭게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는 학생도 있기는 하다. 그런 아이들은 결과적으로도 좋은 성적을 낸다. 반면, 학교 학생 신분을 잊은 채 자신만의 길을 걸으려고 했던 경우에는 결과가 좋지 못했다. 학교에 빠지려 하고, 수업을 안 들으려 하고, 심지어 다른 누구와도 소통하려고 하지 않으려 하니 도움을 주고 싶어도 도움을 줄 수가 없다. 혹시, 재수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고 하더라도, 원만한 인간관계를 통해 건강한 ‘자아’를 형성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를 정상적으로 보내지 않았으니, 사회에 나가서도 ‘부적응’ 하는 경우도 많다. 아까 말한 하버드 대학교의 종단연구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행복했던 사람들과 반대로 고독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외로움 때문에 많이 괴로워했고, 결국엔 더욱 빨리 사망하게 되었다고 했다는 결과를 냈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큰 고난을 겪고 타인에게도 큰 상처를 준다. 인류의 모든 실패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로부터 기인한다.”라고 말했다. 내가 만난 의사 중 한 명은 나를 환자로만 보고, 약을 어떻게 바꿔보자고만 말할 뿐 내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 의사는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병을 치료하는 로봇 같았다. 의사가 될 정도로 머리가 좋고, 똑똑하고, 공부는 잘했을지언정 사람과 소통하는 법은 모르는 것 같았다. 누가 보기에 이 의사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내 눈에는 환자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사회화가 덜 된 부적응한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수험생으로서 대학 입시를 성공적으로 이뤄내는 것이 성공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청소년기에 더 큰 과업은 바로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고, 사회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적절히 인간관계를 맺는 연습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관심과 존중을 받으려 하는 것도, 또는 다른 사람한테 너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도 지나치면 못쓴다. 그 중간이 어려워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의 미덕을 강조한 게 아닐까? 인간관계도 적절한 ‘선’을 지키며,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실패가 아닌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항상 학생들에게 수험생활을 할 때 인간관계로 인해 자신의 1년을 망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게 이제는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