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잘하려면 인지발달과 기억에 대하여 알자.
나는 어릴 적 영재였다. 걸음마도 빨랐고, 말도 빨랐다. 돌이 되기 전에 사물을 구별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또한, 인지 능력도 우수했다. 한창 다른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나는 또랑또랑하게 모든 동요를 불렀다. 만 3세쯤에는 구구단을 다 외울 정도였다. 주변에서 영재교육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많이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를 매우 평범하게 키우셨다.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선조 중 집안에 천재가 있었다. 하지만, 단명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영재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냥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 버전으로 나는 자랐다.
아무리 태어날 때부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아이도 후천적으로 노력을 투입하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는 법. 나는 공부보다는 노는 게 더 좋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까지 성적도 우수한 편이 아니었다. 물론 기본기가 있어서 못하는 편도 아니었다. 어쨌든 더는 영재도 천재도 아니었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 남들과는 다른 비범한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항상 기대하셨던 것 같다.
시험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첫 시험을 쳤다. 첫 성적은 반에서 10등 안에 간신히 들었다. 600명이 넘는 전교생 중에 내 성적은 100등이 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부를 우선시하지 않으셨던 부모님께서 성적을 보고 크게 실망하셨다. 특히, 아버지께서 크게 실망하신 게 느껴졌다.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이렇게 공부할 거면, 차라리 지금부터 나가서 돈이나 버는 게 낫겠다.”라고 하셨다.
지워진 기억이지만, 아마도 내가 말대꾸를 해서 크게 혼났던 것 같기도 하다. 왜냐면 그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봤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나라는 존재는 집에서 인정받는 존재였다. 아버지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내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따뜻한 어머니의 위로 덕분에 다시 회복했지만,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내 인생에 첫 위기를 맞았던 건 사실이었다.
위기를 겪으면 더욱 성장하는 법. 그때를 계기로 처음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성적은 계속 올라갔다. 참고로,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었기 때문에 중3 때 성적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이유로 동기부여가 되어 중3 때는 더 집중해서 공부했다. 그렇게 첫 중3 시험에서 나는 반에서 1등을 했다. 그리고 졸업할 때는 전 과목 ‘수’를 받았다. 이렇게 급격한 성적 향상을 보였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도 명문고 진학을 추천했다.
굳이 지난 나의 어린 시절부터 중학교 때까지 내 성적 이야기를 꺼냈을까? 그 이유는 고등학교 진학 후에 실패한 나의 공부방법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까지 ‘이해력’보다는 ‘암기력’이 우수하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시험 문제도 ‘이해’를 묻는 문제보다는 ‘지식’을 확인하는 정도의 문제가 많이 출제된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말이 달라진다. 암기는 기본이고, 이해하지 못하면 문제를 풀 수 없다.
곧, 이것은 수능 시험의 특징이다. 원래 수능 시험 이전에는 학력고사라는 시험이 있었다. 그러나 암기 위주의 경쟁교육을 유발하고 대학을 점수대로 서열화한다는 비판 여론으로 인해 1994년의 입시부터 대학 입학시험은 수능으로 전환되었다. 수능도 형식으로 볼 때는 같은 시험이지만, 단편적인 교과 지식을 묻는 학력고사와는 달리 종합적 고등 사고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도입된 시험이었다.
또한, 중학교 때까지는 배우는 과목 수도 적고, 시험 볼 때 분량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암기식으로 공부해도 통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수도 많고, 분량도 몇 배나 차이가 난다. 그냥 암기식으로만 공부하면 낭패다. 물론, 배운 내용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이론을 적용할 수 없어서 어려운 문제는 풀지 못하게 된다. 어려운 문제를 틀리면, 점수가 낮아지니 성적도 좋을 리가 없다.
고등학교 때 갑자기 공부가 어려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교육학적인 이론에서 인간의 인지발달과 관련하여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스위스의 발달심리학자인 피아제는 인간의 인지발달은 네 가지 단계인 감각 운동기, 전조작기, 구체적 조작기, 형식적 조작기를 거쳐 발달한다고 보았다. 감각 운동기는 0~1세 영아들이 감각과 운동 능력을 통해 인지발달을 추구하는 시기이다. 전조작기는 2~7세에 해당하며, 이때 기억저장, 정서, 청각, 언어를 관장하는 뇌의 측두엽과 시각자료를 분석하고 처리하는 뇌의 후두엽이 활발하게 발달한다. 구체적 조작기는 초등학교 시기에 해당하며 인지적 사고력, 이해력, 논리력, 추론 능력 등을 담당하는 뇌의 전두엽이 발달하는 시기이다. 형식적 조작기는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가설과 논리적 추론이 가능해진다.
어떻게 보면, 학교 교육과정은 인지발달 능력에 맞게 교육 내용을 설계한 것이다. 따라서, 형식적 조작기에 해당하는 청소년기에는 더 어려운 사고력을 요구하고, 게다가 수능 시험을 대비하는 고등학생의 경우에는 단순한 사고능력보다는 종합적인 사고력을 요구한다. 게다가 청소년기에는 뇌과학적으로 볼 때 작업기억 용량이 늘어나 성인 속도에 도달하는 시기이다.
세계적인 신경과학자이자 교육전문가인 마르틴 코르테는 《전두엽이 춤추면 성적이 오른다》에서 신경섬유 전달 속도는 만 12세가 되면 성인 두뇌 수준에 도달하지만, 인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성인보다 두 배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15세 정도 되면 기억 효율성이 증가하고 작업기억 용량이 늘어나 성인 속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참고로, 작업기억이란 단기 기억으로도 불리는데, 무한대의 정보들을 일시적으로 기억한다. 또한, 인지적 과정을 계획하고, 순서 지으며, 실제로 기억을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사실 중학교 때까지 학생들이 벼락치기 공부를 주로 한다. 평소에는 수업만 듣고, 시험공부는 실제 시험 기간이 다가와야 시작한다. 이렇게 단기간에 공부하면 지식을 암기하여 단기 기억에 잡아두는 것이지 깊게 이해해서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장기기억으로 남겨두지 못한다.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학습할 때는 우리만의 지식의 틀이라 불리는 ‘도식(schema)’을 이용한다. ‘도식(schema)’은 지식을 이해하는 자신만의 사고의 틀이라 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음식을 먹는 행위를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본다면, 음식이 위에서 장에서 소화되는 과정은 ‘도식(schema)’을 통해 이해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만일 이런 과정을 모두 소화해낸다면, 먹었던 음식은 영양분으로 바뀌어 우리 몸에 축적된다. 하지만, 이런 천천히 소화되는 과정이 없고, 급하게 음식을 먹으면 체하거나 그냥 배설물로 배출된다. 다시 인지와 기억 과정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이해를 통해 기억으로 가져가는 것은 장기기억이 되지만, 급하게 암기식으로 지식을 습득하면 잠시 단기 기억으로 남았다가 휘발성에 의해 모두 사라진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단기 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꾸기 위해 ‘유미의한 부호화’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정보의 처리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다른 주제를 다룰 때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겠다.
대신 암기식 공부법이 좋지 못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기억과 망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독일의 심리학자인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 이론’에 따르면, 새로운 지식을 학습하는 순간부터 기억이 사라진다고 했다. 처음에 학습한 내용을 100%라고 한다면, 20분이 지난 시점에는 58.2%, 1시간 후에는 44.2%, 9시간 후에는 35.8%, 1일 후에는 33.7%, 2일 후에는 27.8%, 6일 후에는 25.4%, 한 달 후에는 21.1%만 기억이 남게 된다고 했다.
‘망각곡선 이론’에 따르면, 벼락치기를 통한 암기식 학습 방법은 결국 시험 기간에는 지식이 기억에 남아있지만, 시험이 끝나고 나면 기억이 점점 사라지게 된다. 나도 고등학교 때 시험을 망친 후, 다음 시험은 잘 보겠다며 미리 시험공부를 시작한 적이 있다. 시험 3주 전부터 미리 해당 과목을 끝냈는데, 막상 시험 기간이 다가와서 공부할 때 보니 공부했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매우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망각곡선 이론’을 몰랐기 때문에, 한번 공부해두면 기억이 계속 유지가 되는 줄 알았다. 어떻게 보면, 이해보다는 이런 식의 암기식의 공부법이 항상 안 좋은 결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고3 때 모의고사 문제를 풀며 공부했던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2001학년도 수능 난이도가 쉬워서 고3이었던 해 모의고사 문제들은 대체로 쉽게 출제됐다. 종합적 사고능력을 묻는 수능 시험이었지만, 모의고사 문제를 많이 풀어보면 비슷한 문제가 나와서 점수가 잘 나왔다. 실제 최상위권 학생들은 모의고사 400점 만점에 거의 만점 가까이 받았다. 그때는 깊게 사고하지 않고 어느 정도 내용을 암기하고 있으면, 틀린 문제도 다음에는 맞힐 수 있었다. 최상위권 학생들만큼은 아니었어도 암기식으로 공부하던 나도 꽤 혜택을 봤다. 하지만, 2002학년도 수능은 역사상 최고로 난도가 있었던 ‘불수능’이었고, 그런 방식으로 공부하던 학생들은 모두 매운맛을 볼 수밖에 없었다.
반면, 모의고사 성적이 금방 오르지는 않았지만, 자신만의 속도로 정확히 내용을 이해하며 공부했던 친구들은 그 어려운 ‘불수능’ 구덩이에서도 살아남았다. 다들 불에 타서 재가된 점수를 받았지만, 그 친구들은 꿋꿋하게 성적을 유지하거나 심지어는 성적이 향상된 친구도 있었다. 내가 추구했던 수박 겉핥기 식의 ‘암기’ 위주의 공부법은 그렇게 패했고, 지식과 정보를 자신만의 지식의 틀(도식)에 끼어 맞추며 꼭꼭 씹어 소화시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공부법은 승리했다. 학습에서 기본이 되는 것이 ‘암기’라고 많이 말한다. 하지만, ‘암기’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해’라는 것은 잊지 못할 교훈이 되었다. 아직도 외우는 일에만 급급한 사람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내가 지금 추구하는 공부법이 맞는지, 혹은 아닌지 꼭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