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은 버리고, 자존감을 높이자.
정신과 의사이자 《자존감 수업》의 저자인 윤홍균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자존감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관한 생각의 개념이라면, 이에 수반되는 감정을 자존심이라 부른다고 했다. 또한, 비난을 받거나 트라우마가 생겨 일정 선 밑으로 감정이 추락하는 것을 ‘자존심이 상한다.’라고 표현한다고 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깊은 관련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차이가 크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낫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현실적으로 자신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 자신의 장점도 알고, 동시에 단점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문제나 어려움이 생겨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며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한다.
동기부여 강연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자존심은 버리고, 자존감은 높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쓸데없이 자존심을 부리기 일쑤다. 자존심 때문에 될 일도 안 된다. 친구 중에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도 10년 넘게 계속 수험생활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5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는데 매년 최종 단계에 가서 계속 떨어지자 도전을 멈출 수 없었다. 주변에서 혹시 모르니 보험으로 7급이나 9급 시험이라도 같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명문대를 나와서 고작 7급, 9급 공무원이 되는 게 말이 되냐며 반박했다. 그렇게 고집을 꺾지 않고 자존심을 세웠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결국 이 친구는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나이를 먹어가며 오히려 슬럼프를 겪었고, 심지어 1차 시험도 떨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친구도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 갔다. 결국, 자신이 10년간 준비해오던 시험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도 10년간 부렸던 자존심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남은 건 낮아진 자존감뿐이었다. 거듭되는 실패로 인해 친구는 좌절을 겪었다. 명문고, 명문대 출신이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씁쓸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욕심을 부리면 꼭 큰 코 다친다.”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다.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인해 지나친 욕심을 부렸고, 그 욕심으로 인해 힘든 인생을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이런 부류의 학생들을 종종 만났다.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해서 고등학교에 왔기 때문에 대체로 학생들은 자존감이 높은 편이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와서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데도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고 자존심을 부리는 경우가 생긴다. 대학 입시를 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건 내신 성적이다. 내신 성적을 어느 정도는 맞춰서 원서를 쓰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입시상담을 하는데, 한 학생이 자신은 명문 대학이 아니면 원서를 쓰지 않겠다고 했다. 어차피 그해에 못 가면 재수할 거라서 내신과 상관없이 그냥 명문대만 원서를 쓰겠다고 했다.
사실 내가 보기엔 이 학생은 서울에 소재한 중상위권 대학에 충분히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이었다. 조금만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확인한다면 재수하지 않고도 진학할 대학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결정하고서 조언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불 보듯 뻔히 재수하게 될 거라 예상됐다. 하지만, 조언만 해줄 뿐 한 사람의 인생을 내 맘대로 결정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택은 결국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처음 고3 담임을 하게 되었을 때 동료 교사한테 들은 조언이 있다. 학생과 입시 상담할 때, 아무리 정답이 정해져 있어도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실제 그 동료 교사가 수시 상담에서 합격할만한 대학을 자신의 반 학생에게 추천했는데, 대학에 합격하고도 고마워하지 않고 오히려 원망만 들었다고 했다. 그 학생의 말에 따르면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담임교사가 너무 낮게 추천을 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게 됐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학생은 실제 자신의 내신 점수로 갈 수 있는 대학보다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니 억지가 이런 억지도 없다. 만일 담임교사가 추천하는 대학에 지원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높게 지원했다면, 불합격했을 거고 심지어 재수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는데, 보따리 내놓으라 하는 경우와 같다. 그런 일을 겪은 이후로는 그 동료 교사는 다시는 학생들에게 강력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됐다. 나도 상담할 때 강한 어조로 말하지 않는 편이다. 대신 부드럽게 말한다. 개인적인 의견이니까 참고해서 잘 결정하라고 조언만 한다. 단, 학생이 현명한 판단할 수 있도록 정확한 데이터를 최대한으로 제공하는 데 의의를 둔다.
명문 대학만 지원하겠다고 했던 우리 반 학생은 결국 수시 전형과 정시 전형에서 모두 합격하지 못했다. 그 학생의 말이 씨가 됐다. 재수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자신이 선택한 길이라서 후회가 없다고 했다. 그런 마음이라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힘든 재수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해가 지나 다음 해에도 나는 고3 담임을 하고 있었는데, 그 학생한테 연락이 왔다. 수시 상담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정시로만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수시 상담이라니 의아했다.
그 학생을 위한 입시 지원 전략 자료를 만들었다. 내신 성적부터 확인해봤다. 3학년 2학기 성적이 좋지 않아서 작년보다 전체 평균 내신 점수가 조금 떨어졌다. 그래도 아직은 수시로 해 볼 수 있는 점수대였다. 지원해서 합격할 가능성이 있는 대학을 추렸다. 작년에 모아둔 자료랑 비교해보니 생각보다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학생이 또 자존심을 부릴지 아닐지가 관심사였다.
왜 정시 전형이 아닌 수시 전형으로 진학하려는지 이유를 물었다. 막상 정시 전형으로 대학에 가기 위해 수능 공부를 하는데 생각만큼 점수가 잘 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혹시 수시 전형으로 갈 방법은 없을까 생각이 들어 연락했다고 했다. 몇 개월 사이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학생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명문 대학이 아니면 안 된다던 생각도 없었다. 자존심을 부리던 모습은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덕분에 마음 편하게 상담을 진행했고, 이 학생도 수용적인 자세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만일 지난해 내 말을 들었으면, 지금 추천해주는 대학에 합격할 확률이 높았는지 물었다. 내 생각에는 그랬다. 그래서 아마도 그랬을 거고, 오히려 지금 상황보다 더 좋았을 것이라 말했다. 학생의 얼굴을 보니 후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신의 입으로 “제가 괜한 자존심만 안 부렸어도 작년에 이 정도 대학에는 합격할 수 있었겠네요.”라고 말했다. 자존심을 부리지 않고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 이런 마음이면 올해는 자신의 위치에 맞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나의 예상이 맞았다. 수시로 지원한 학교 중에 한 군데에 붙었다. 비록 자신이 원하던 SKY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매우 만족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보였다.
20년 전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사실 나는 지금도 후회할 선택을 했다.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공부를 잘하던 한 친구는 고등학교 명성보다는 집에서 가깝고 통학하기 쉬운 학교를 택했다. 반면 나는 명문고 진학을 택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자존감이 높았고, 나는 자존심이 셌다. 그 친구는 자신이 어디에 가서든 자신이 하기 나름이라 생각했고, 나는 명문고를 가면 명문 대학에 진학하는 게 더 쉬울 것이라 믿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승승장구했고, 나는 고등학교에 가서는 계속 추락했다. 그 친구는 결국 명문 대학에 진학했고, 나는 두 번이나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이렇게 자존감과 자존심의 대결 구도에서 자존심이 패배하는 결과를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어떤 방법을 동원하고 핑계를 대서라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존심이 밥 안 먹여 준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자존심을 내려둘 필요가 있다. 자존심 때문에 발생한 유명한 전쟁사를 살펴보면 더욱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고전 문헌학자인 배철현 작가는 《그리스 비극 읽기》라는 칼럼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은 전쟁의 원인을 생존이나 이념이 아니라 자존심에 난 상처에서 찾았다.”라고 말했다.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의 이유는 다름 아닌 자존심 때문이었다. 스파르타의 왕이었던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부인 헬레네가 트로이 왕자와 사랑에 빠져 도망친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것이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었다.
만일 내가 자존심을 부리지 않고 집 가까운 고등학교에 진학했더라면 내 자존감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그렇게 바라던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을 텐데. 또한, 명문 대학을 졸업한 친구가 5급 공무원이 아니어도 9급부터 시작했다면 10년도 훨씬 지난 지금은 5급 정도로 진급해서 살고 있었을 텐데. SKY만 고집했던 우리 반 학생도 현실을 인식하고 고3 때 그냥 자신이 갈 수 있는 대학에 지원했다면 굳이 1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괜히 한번 부렸다가 다들 그렇게 후회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며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의 저자인 정정엽 원장은 높은 자존감은 건강한 자기감 위에 세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자존감’이 자신을 존중하는 감각이라면, 자기감을 자신을 이해하는 감각이다. 따라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인지하는 자기감을 바로 세우는 일이 먼저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존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했다. 적을 알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바로 나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기 전에 내 위치를 먼저 확인하는 것은 어떨까. 2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도 잘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