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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Dec 01. 2020

<31> 때로는 헝그리 정신이 필요해

결핍은 오히려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면 ‘꼰대’라는 말을 듣는다. ‘헝그리 정신’은 풍족하게 먹고살 수 있게 된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린다. 근데 내가 말하고 싶은 ‘헝그리 정신’은 풍족한데 일부러 굶어가며 무언가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누구든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가져야 할 자세라 하고 싶다.  


내가 호주에 있는 대학원에 유학을 다녀왔다고 하면 많은 사람은 우리 집이 잘 사는지 오해한다. 그런 기대와 오해에 미안하지만 나는 부모님 도움받지 않고 가난하게 유학 생활을 했다. 우리 집 사정을 생각하면 대학을 졸업하고, 장교로 군을 전역하면서 나는 사실 취업을 하는 게 맞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20대의 끝자락에서 그냥 현실에 순응하며 살기가 싫었다. 대학 진학 후에 많이 노력했지만 내가 가진 부족한 점을 채우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어학연수를 계획했다.     


처음엔 항상 부족하다고 느꼈던 영어 말하기 실력을 더 높이기 위해 북미권에 있는 국가를 고려했다. 당연히 미국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2010년에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릴 예정이라 마음이 바뀌었다. 전역 후 몇 달 전 미리 가서 영어를 배우며 올림픽 행사장 근처에 일자리를 구하면 괜찮을 거란 그림을 그렸다. 매번 좋은 성적을 내고 있던 김연아 선수를 직접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항상 이상과 현실은 괴리가 있는 법. 어학연수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우선은 내가 가진 예산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었다. 북미라는 지역을 선택한 이유도 경제적인 사항이 고려된 차선책이었기 때문이다.     


2009년 6월 전역을 앞둔 나는 2년 4개월 동안 장교로 근무하면서 받았던 월급을 모았다. 2007년에 받은 첫 월급이 120만 원 정도였고, 전역할 때쯤엔 월급이 140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가 아닌 의료보험료를 내면서 받는 진짜 월급이었기에 부모님께 그동안 받은 것을 보답하고 싶었다. 퇴직에 가까워진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 달에 70만 원씩 보내드렸고, 나머지 돈은 최대한 어학연수 비용으로 저축했다. 대충 계산하니 전역할 때쯤엔 천만 원 정도 모았다.     


내가 가진 예산은 천만 원, 대략적인 어학연수 기간은 1년 정도로 생각했다. 그때는 보통 최소 이천만 원은 있어야 1년 정도 어학연수가 가능했다. 절반은 모았으니 나머지 돈은 일하면서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차근차근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는데, 올림픽이 가까워지자 미국과 캐나다 달러 환율이 많이 올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환전하면 내가 가진 천만 원이라는 돈이 그만큼 가치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까웠다. 하릴없이 계획 변경이 필요했다.     


그때 마침 호주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한 친구가 있었다. 호주 환율은 800원대였기에 새로운 선택지로 물망에 올랐다. 사실은 대학 4년 내내 영국 영어에 매력을 느껴서 영국에 가는 게 소망이었다. 근데 미국 환율의 거의 두 배에 가깝고, 물가도 비싸서 엄두도 못 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북미 지역으로 생각했다. 사실 호주는 머릿속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무지해서 호주는 영어 사투리를 쓰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대학원에서 영어권 국가에 대한 분류에 대해서 배우기 전까지는 그랬다.     


인도 언어학자 Kachuru는 영어를 세 개의 원(Inner, Outer, Expanding Circle)으로 나눠서 구분했다. 가장 안쪽은 영어를 모국어(Mother tongue)로 쓰는 국가로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이다. 두 번째는 영어를 두 번째 언어(ESL: English as Second Language)로 쓰는 국가로 인도, 싱가포르, 나이지리아, 필리핀 등이 해당한다. 마지막 원에는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영어를 외국어(EFL: English as Foreign Language)로 쓰는 국가들이 있다. 결론은 내가 영어 사투리를 쓰는 나라라고 생각했던 호주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국가이기 때문에 그동안 가졌던 편견을 버릴 수 있었다. 호주로 어학연수를 가는 이유는 다만 경제적인 효율성 때문이었다. 나중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고서는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지만, 최종 목적지는 호주가 되었다. 친구가 머무르는 곳에 함께 있어도 좋다고 해서 안심됐다. 한 가지 더 갑작스러운 일은 이왕 공부하기로 했으니 대학원에 지원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밑져도 손해를 보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가진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방향을 틀고, 일을 진행하는 건 내 성격과는 조금은 달랐지만, 일이 되려니 그렇게 진행됐다.      


대학원 입학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했고, IELTS 시험 성적도 필요해서 3개월 동안은 어학 시험공부만 했다. 영어 말하기 실력 향상이 처음 목적이었는데 조금은 목적이 전도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도전해 볼만 한 일이었다. 더 어려운 학문을 공부하며 영어를 배우면 더 실력이 많이 향상된다는 친구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다. 막상 대학원에 합격하고 군대에서만큼 힘든 유학 생활이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한 건 큰 잘못이었다.      


호주는 복지 국가라서 자국민은 학비를 적게 낸다. 반면 외국인들한테는 학비가 엄청 비싸다. 대략 한 학기에 10,000불 정도가 든다. 내가 준비한 돈은 천만 원이었으니 학비를 내면 나의 예산은 0원이 되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호주로 갔을 때는 환율이 갑자기 1300원으로 치솟았다. 학비를 내야 하는 시점이 되었을 때 환전을 했는데 돈이 부족해서 친구한테 돈을 빌려서 10,000불을 채웠다. 그때 내게 남은 돈은 2달러뿐이었다.

     

간신히 학비는 냈는데 생활비가 없어서 손가락을 빨아야 했다. 염치가 없었어도 친구한테 일주일 생활비를 더 빌리려고 했다. 근데 친구도 나한테 돈을 빌려줘서 6달러밖에 안 남았다고 했다. 호주에서 겪었던 첫 위기였다. 일주일 동안 둘 다 굶어야 할 판이었다. 위기가 극에 달하자 자존심도 염치도 사라졌다. 그때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고 있었다. 부끄럼을 무릎 쓰고 과외비를 미리 받을 수 있을지 물어봤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고 과외를 받던 학생 덕분에 간신히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3관왕에 오른 임춘애 선수는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언론 보도 과정에서 곡해가 있어서 진실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이겨낸 헝그리 정신을 보여준 사례다. 실제 헝그리 정신은 가난했던 1970년대로 올라간다.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권투를 시작해서 챔피언이 된 김득구 선수가 그 실제 사례다. 국어사전에도 ‘빈곤하고 굶주린 상태와 같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듯한 마음으로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자세’를 헝그리 정신이라고 한다. 과거의 라면 일화가 진실이 아니었다고 했지만, 가난하고 힘들었던 호주에서의 유학 생활을 버티기 위해서는 나는 라면을 먹으며 생활했다.

     

과외하고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하면서 한 달에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은 1,000달러 정도였다. 집세로 500달러 정도 내고, 교통비로 250달러를 쓰면 나머지 250달러로 한 달 생활비로 썼다. 1주에 대략 60달러씩이니까 하루에 10달러 정도 사용할 수 있는 돈이었다. 거의 매일 점심은 5달러짜리 도시락을 사서 먹고, 저녁엔 1달러짜리 라면을 끓여서 밥을 말아먹었다. 돈을 최대한 아껴서 주말에는 한 번이라도 고기를 먹으려 노력했다. 과일을 먹거나 디저트를 먹는 건 사치였다. 물론 그 와중에 돈을 아끼고 모아서 시험이 끝난 다음 날에는 대학원 친구들과 만나서 맛있는 음식을 사서 먹기도 했다.      


그렇게 1년 넘게 생활을 하니 살이 쪘다. 눈 아래 근육이 심하게 떨렸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진료를 받아보니 ‘영양 불균형’이라고 했다. 눈이 떨리는 이유는 과일과 같은 비타민이나 칼륨 섭취가 부족해서 오는 영양 불균형 증상이라고 했다. 호주에 처음 갔을 때 69킬로였는데 한국에 오니 10킬로가 늘어 79킬로였다. 근데 영양 불균형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반면 옆 방에 같이 지내던 유학생은 부모님이 학비, 생활비를 모두 지원했다. 그 친구는 아르바이트는커녕 매일 오락하고, 애니메이션 보고, 연애하며 하루하루 매우 여유롭게 지냈다. 불행의 씨앗은 비교에서 온다고 했다. 나와는 많이 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을 지켜보며 나는 왜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나를 도와줄 수 없는지 원망했다. 한 번은 학기 중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비행기 표 가격이 비싸고, 돈이 부족해서 장례식에 갈 수 없었다. 그때는 정말 돈이 없는 게 서럽다 못해 원망스럽고 괴로운 마음이었다. 또 한 번은 과외하는 학생한테 돈을 떼여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돈 때문에 힘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매일 다짐했다. 비록 지금은 돈이 없어서 악착같이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하지만, 이 힘든 상황을 버티겠노라고. 반드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내겠노라고. 매일 울면서 다짐했다. 과외 아르바이트는 시간당 버는 돈은 많았는데, 불규칙적으로 버는 수입이라 항상 불안했다. 어쩔 수 없이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도 시작했다. 수입은 나름 고정적이었지만, 군대에서 다친 무릎이 아팠다. 보호대까지 차면서 버텼지만, 통증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 했다.      


처음 호주에 넘어가서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까지 유학생 문화를 잘 몰라서 친구한테 신세를 지고 있었다. 친구가 머무는 집에 머물러도 좋다고 해서 나는 1년 정도 신세를 질 생각이었다. 방세를 매주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말이다. 두 달 정도 친구가 아무 말이 없다가 많이 힘들었는지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자기가 방세를 내고 있는데, 이제는 부담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 순간 ‘아차’ 싶었다. 꼭 친구한테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었지만, 학비를 내느라 생활비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던 터라 친구의 고충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말 미안했다. 그동안 친구한테 진 빚을 갚기 위해 무릎이 아파도 참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일했다.      


나중에 친구와 오해를 풀고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빈대 같았다고 했다. 한 번은 지인이 하루 거실에서 머물러도 되겠냐고 해서 머물게 한 적이 있었다. 친구는 나를 보며 ‘빈대가 빈대를 데려온 느낌’이었다고 했다.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슬펐다. 친한 친구한테도 오해받고, 몇 달 동안 빈대가 되었던 내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 친구는 내가 호주에서 공부할 수 있게 많이 도와주었고, 은인 같은 존재다. 그런 사이인데 내가 친구에게는 그런 사람이었고 부담을 줬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생각났다. 외국에서 유학할 여건이 안 되는데 억지로 하려니 더 힘들었다. 근데 나의 도전에 대한 후회는 없다. 많이 힘들었지만 얻은 것도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딜 가도 굶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힘들 때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인생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이 힘들고 지치고 괴로웠지만, 그만큼 단단해지고 강해졌다.      


할리우드 콘셉트 디자이너 스티브 정은 “결핍이 나를 열정적으로 일하게 만들었다. 너무 가난해 제약이 너무 많았고, 기회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 몸에서 '해보고 싶다', '이루고 싶다'라는 간절함이 넘쳐났다. 결핍이야말로 성장을 가져다주는 가장 센 동력이다.”라고 했다. 그만큼 결핍은 오히려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는 말이다.


호주에서의 가난이라는 결핍은 나에게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성실하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었다. 아주 가끔은 더 완벽히 준비하고 유학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후회할 때도 있다. 그래도 그때가 상황 속에서는 최선이었다고 믿는다. 영화 《넘버 3》에서 배우 송강호의 대사가 기억난다. “잠자는 개한테는 결코 햇빛은 비치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헝그리 정신으로 버틴 호주에서의 유학 생활은 큰 의미가 있었다. 조관일 작가가 쓴 《헝그리 정신》라는 책에는 ‘고통 총량 균등의 법칙’이 나온다. 이는 신이 인간에게는 같은 양의 고통을 준다는 말이다. 힘들 때가 있으면 행복한 때가 다가온다는 말이기도 하다. 힘들었지만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나의 호주 유학 도전기를 해피 엔딩으로 끝내보면 어떨까 싶어 한 마디 더해본다. 가진 게 없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에 모든 것을 걸게 되어있다. 만화 《슬램덩크》 주인공 강백호도 아무런 희망이 없었지만, 농구라는 희망에 인생 전부를 걸었다. 나도 내가 호주에서 할 수 있는 건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매일 학교에 가서 수업 듣고, 방과 후에는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책을 들었다. 또한, 언어의 한계와 장벽을 넘고자 더 많은 글을 읽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과정에 충실한 도전은 좋은 결과로도 이어졌다. 무사히 졸업했을 뿐만 아니라 상위 우수 졸업생에게만 부여하는 우등 졸업생(Golden Key Member) 자격을 받았다. 그러니 적어도 나는 호주에서의 역경을 헝그리 정신으로 이겨내고 승리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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