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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나도 남편, 아빠는 처음이라

세상에서 가장 힘들지만 가장 보람 있는 일

by 신영환 Dec 11. 2020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인생에 큰 변화를 한 번씩 겪는다. 그 시점도 상황도 모두 다르지만, 주변을 보면 비슷하게 인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내 주변 사람들은 10대에는 대학을 가려고 공부했고, 20대에는 취업 준비를 위해 노력했다. 선택의 문제이긴 하지만 30대로 접어들면서는 결혼을 생각했다. 생애주기로 봤을 때 나는 내일모레 40대를 바라보니 지금은 결혼과 육아라는 산을 넘고 있다. 산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우리 인생은 매번 도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언제냐고 물으면 나는 예전엔 군대에서의 시간이라고 대답했다. 이 답변에 돌아오는 말은 “장교로 군 생활해서 편하지 않았었냐”이었다. 사실 군인을 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군 생활은 힘들다고 생각한다. 계급이라는 철저한 위계질서 하에 지켜야 할 것도 너무 많고, 고된 노동과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나도 한 달 넘게 훈련에 나가서 탱크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아찔했던 순간이 많았다. 하늘이 도왔는지 몰라도 다행히 무사히 넘겼지만, ‘아차’하는 순간들을 수없이 경험했다. 그렇기에 장교든 부사관이든 병사든 누구라도 생명은 소중하기에 군 생활이 누가 더 힘든지는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사람이 힘든 건 상대적이라서 비교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군대에서 어떤 보직이 더 힘든가, 어떤 계급이 더 힘든가를 따질 수 없다는 말이다. 자신이 맡은 일이,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자신이 힘들게 보내고 있는 그 시간이 가장 힘든 게 아닐까 생각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봇 머튼이 말한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상대적 박탈감은 준거집단에 의해 달라진다. 여기서 준거집단은 개인이 자신의 신념, 가치, 태도,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고 스스로 동일시하는 사회집단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인은 비교가 되는 다른 집단의 상황과 자기 자신과의 조건을 비교하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상대적인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군대에서 병사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하니까 괴롭다고 생각한다. 반면 간부는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병사들이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둘 다 고충이 있고, 힘들다는 말이다. 전역을 한 달 앞두고 우리 부대가 주관하는 훈련에 나간 적이 있었다. 장기 복무 계획이 없었는데도 참모를 맡고 있던 나는 훈련계획부터 진행까지 모두 책임을 맡았다. 실제 훈련에 나가서는 일주일 내내 하루에 2시간도 못 자고 일했다.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하버드 대학에도 붙었을 거라 생각이 들 정도로 쉬지 않고 일주일을 보냈다. 그때 나는 병사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동기들이 부러웠다. 실제 전차를 타고 기동 하느라 낮에는 힘들지만, 적어도 밤에 잘 시간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누군가와의 상황 비교를 통해 생기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내가 더 힘들다고 생각하게 된다. 근데 사실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기에 모두가 힘든 상황인 거다. 그래서 누가 제일 힘든 거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군대에서 가장 힘든 보직은 바로 자신이 맡은 보직이다.” 남들과 비교해봐도 결국 내가 가장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데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고도 엄청 힘든 일이 있다. 그건 바로 육아다. 원초적인 본능마저 빼앗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는 게 육아이기 때문이다. 근데 육아에 앞서 결혼이라는 시점부터 우리는 요새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우선 대학입시를 두 번 실패했던 20대 초반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만일 인생을 반으로 나눈다면 나는 인생 2막은 결혼 시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기준은 내가 주체가 되느냐 아니냐에 달렸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동안은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내가 주체가 되어 책임질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해주시는 밥을 먹고, 부모님이 제공해주시는 집에서 잠을 자고, 부모님이 사주시는 옷을 입었다. 집안일도 거의 부모님이 다 해주시니 내가 해야 하는 건 그냥 내 몸 하나만 건사하는 일뿐이었다. 쉽게 말하면 내 앞가림만 하면 되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부터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무엇이든지 내가 알아서 결정해야 하고, 책임도 지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아내와의 상의를 통해서였지만, 부모님들한테 도움을 받기만 하는 인생이 아닌 우리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요새는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위기에 처한다. 결혼 준비를 하다가 깨지는 커플이 얼마나 많은지, 주변에만 봐도 넘친다. 물론 나도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면 결혼하지 못했을 것 같다.     


결혼 정보 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배우자 선택 조건으로 1순위는 성격이다. 다음으로는 남녀의 의견이 조금 다르지만, 직업, 경제력, 가정환경이 상위권에 위치해있다. 결혼 적령기였지만 나는 직업도 불안정했고, 모아 놓은 돈도 없었고, 그렇다고 집이 잘 사는 것도 아니었다. 속된 말로 표현해 보자면 나는 ‘똥차’였다. 사정이 있었지만, 남들에게는 핑계가 될 뿐이었다. 근데 아내는 내가 가진 잠재력을 봤고, 내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사실 나에게 결혼은 인생에 있어 큰 도전이었다. 실패한 인생으로 살지 않기 위해 20대는 성장을 위해 많은 걸 포기했었다. 그중 하나가 연애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취업 준비를 할 때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하지 못한 것이었다. 남들처럼 일하지 않고 공부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원 졸업 후 바로 취업 전선에 뛰었다. 물론 몇 년 동안 불안정한 계약직으로 일하며 계속 도전했다. 그러면서 대학원 학비로 빌렸던 돈도 갚고, 조금씩 저축하며 결혼자금도 마련하고 있었다. 근데 하늘도 무심하지 어머니께서 갑자기 아프셔서 수술하게 됐다. 집에서는 처음 있었던 일이라 많이 놀랐다. 혹시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언제 효도해보나 하는 마음에 모아둔 돈으로 어머니께 차를 덜컥 사드렸다. 덕분에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사람 하나만 보고 결혼을 결정한 아내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걸 이해하고 가족처럼 대해 주시는 처가 어른들께도 감사한 마음이다. 내가 정교사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처가 어른들께서는 바로 상견례를 잡으라고 하셨다. 안 그래도 이번 해에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니까 결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좋은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그리고 상견례 때에도 정말 편안한 분위기로 식사했다. 보통은 상견례 때 결혼을 무르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퇴직 후 귀향하신 우리 부모님께 아들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시키셨다. “예비 사위는 저희가 잘 챙기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하셨던 장인어른의 말씀은 정말 현실이 되었다. 신혼집으로 아파트를 새로 분양받으면서 공사가 끝날 때까지 갈 곳이 없었던 나를 결혼 전부터 처가에 머물게 해 주셨다. 남들이 들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결혼 전부터 나는 처가 어른들과 함께 살면서 가족이 되어 갔다. 그렇다고 데릴사위는 아니었다. 주말마다 여행도 다니고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짧은 시간 내에 가까워졌다. 지방에 멀리 계신 부모님이 오해해서 들으시면 서운하실 수도 있을 정도로 가끔은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잘해주셨다.      


식구(食口)라는 말은 한자 그대로 ‘한집에서 같이 살며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렇게 나는 처가 식구들과 결혼 전부터 식구가 되었다. 분양받은 아파트 공사가 끝날 때까지 2년 동안 그렇게 함께 살았다. 사실 빚을 내는 걸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편협한 사고를 하는 나에게 경제적 개념을 알려주신 것은 처가 어른들이셨다. 그래서 결혼할 수 있었고, 집도 구할 수 있었고, 내 인생의 2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품에서 떠났다. 그때는 첫째가 태어났고, 사정상 아내의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살게 되었다. 육아와 조부모 부양을 동시에 하게 된 것이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100일 동안 매일 2~3시간마다 깼다. 군대에서 일주일 동안 하루에 2시간밖에 잠을 못 잤던 건 약과였다. 몇 달 동안 기본 욕구인 수면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점점 우리는 지쳐갔다. 심지어 아내는 산후우울증이 와서 많이 힘들어했다. 아기 키우는 거도 힘든데 지병이 있으신 할머니까지 챙기다 보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두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처가 어른들이 가까이 살고 계셔서 우리가 많이 힘들어하는 걸 알고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쉬고 오라고 시간을 주셨다. 근데 우리는 빈집에서 그동안 힘들었던 이야기를 나누다가 펑펑 울었다. 우리는 둘 다 교사라서 교육학 이론도 알고 하니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자부했다.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도 많이 공부하고 실천했다.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 비타민 B 성분인 엽산 섭취 시기부터 태교까지 섭렵했다. 심지어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 출산 방법도 연구했다.      


출산 방법에는 자연주의 출산, 자연 분만, 제왕절개 이렇게 3가지가 있다. 개인차가 있을 수 있지만,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는 출산 방법의 순서를 나열한 것이다. 자연주의 출산은 수술이 아닌 옛날 방식 그대로 출산을 하는 거라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다. 다만 조건이 되어야 이 방식으로 출산을 할 수 있어서 미리 준비해야 했다. 출산할 때 아이의 크기와 엄마의 골반 크기가 맞아야 하는 다소 까다로운 출산 방법이다. 그래서 낳고 싶어도 못 낳는 경우도 발생한다. 우리는 자연주의 출산을 위해 강의도 같이 들으며 함께 출산 준비를 했다.      


강의를 들으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산부인과 의사가 아내가 제왕절개로 출산을 하자 아내의 질에 있는 분비물을 일부러 묻혀서 아기의 입에 묻혔다고 한다. 그만큼 자연 출산 과정에서 아기가 면역이 생기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꽉 막히고 좁은 엄마 몸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출산의 고통을 느끼며 인내하고 견디는 힘도 기를 수 있다고 했다. 자연의 신비로움이지만, 그래서 다른 출산 방법보다 자연주의 출산으로 태어난 아기가 건강하다는 말이다. 실제 첫째는 그렇게 태어나서 1년 가까이 아픈 적이 한번 없었다.      


우리 부부는 임신도 계획대로 바로 됐고, 출산도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냈다. 어떤 부부는 임신도 어렵고, 출산도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우린 정말 행운이었다. 아직도 생생했던 출산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자연주의 출산은 아내의 진통을 함께 견디다가 아이 머리가 나올 때가 되면 아이를 남편이 직접 받는 방식이다. 아이가 머리가 나오고, 몸통과 다리까지 나오는 모든 과정을 볼 수 있다. 탯줄을 자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막 태어난 아기를 안아 볼 수도 있다. ‘캥거루 케어’라고 부르는 건데 부모와 아기가 교감하는 시간이다. 어두운 방 안에서 차분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출산하기에 수술실에서 출산하는 것보다 안정적인 느낌이다. 운 좋게도 우리 부부는 첫째도 둘째도 모두 자연주의 출산으로 낳을 수 있었다.      


첫째 둘째 모두 임신과 출산은 성공적이었다. 근데 딱 한 가지 육아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살아 있는 생명체는 다양한 변수를 만들어냈다. 출산 여성한테 임신(입덧), 출산, 육아 중에 무엇이 가장 힘든지 물으면 대다수가 육아가 가장 힘들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이유는 가장 긴 시간 동안 해야 하고, 살아 있는 생명체라서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리 육아 관련 책을 보면서 공부해도 육아하면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첫째를 키우며 기억나는 건 모유와 분유를 병행하는데 분유가 맞지 않는지 분수 토를 계속해서 고생했다. 고민을 지인한테 이야기했더니 조금 가격이 나가지만 많은 아이가 부작용이 없는 외국 분유를 먹여보라고 했다. 자주 품절 현상이 일어나는 제품이라 구하기 어려웠다. 밤낮 할 거 없이 틈틈이 판매 사이트에 들어가서 재고가 있나 없나 확인하는 게 그때 일이었다. 다행히 분유를 힘들게 공수해가며 먹였더니 아이는 괜찮아졌다.      


첫째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아이 둘 다 유행하는 질병에 걸려 고열이 나고 힘없이 축 처진 모습을 볼 때 많이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대신 아파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야속했다. 우는데 이유를 모를 때도 너무 답답했다. 아이가 어리니 잠도 못 자고 매일 우는 소리를 듣다 보니 둘째를 낳고 나서는 내가 우울증이 왔다. 베란다 창가에 올라서서 뛰어내리면 어떨까 하고 몇 번이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감기라 불리는 우울증에 걸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를 가끔 발견하곤 했다. 운전하다가 끝없이 우는 아이에게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집에서도 난리 부리는 아이들에게 소리치는 나를 보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분명 좋은 아빠가 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육아 스트레스로 체중도 10킬로나 늘어났다. 살이 찌니까 어깨, 허리, 무릎 등 관절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다. 손끝과 발끝이 찌릿했다. 육아가 얼마나 힘들다고 그러겠냐만 몸과 마음 모두 지쳐가고 있었다. 심지어 ‘나’라는 자아는 사라지고, ‘아빠’, ‘남편’, ‘가장’이라는 자아만 남게 되었다. 자아정체성을 항상 찾는 나로서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닌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게 이상했다. 책임감에 내가 해야 할 일을 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근데 ‘나’라는 존재가 없는 삶이라니 오류가 발생했다. 그때부터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다시 출근길이었다. 육아 출근길 말이다. 옷 갈아입고 아내와 번갈아 가며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했다. 주말에는 종일 육아와 집안일을 하고 월요일이 되면 녹초가 되었다. 친한 학교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가 육아와 집안일로 몸이 좀 아프다고 말했다. 대체 얼마나 일하길래 그렇냐고 물으시길래 내 삶을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듣더니 아빠도 엄마도 너무 쉴 틈이 없는 것 같다며 돌아가면서라도 쉴 틈을 만들라고 조언해주셨다. 근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4살짜리 아이와 막 돌이 지난 2살짜리 아이를 혼자서 돌보는 건 정말 힘들기 때문이다. 거기에 집안일까지 혼자 하려면 노동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군대가 가장 인생에서 힘든 일일 줄 알았다. 근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군대에서는 내 몸만 잘 건사하면 되는데 결혼과 육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두 어깨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과거와는 달리 남편도 육아와 집안일이 내 삶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이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처럼 여자는 아니라서 그만큼의 안타까움을 겪지는 않는 것 같다.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해 육아와 집안일에 참여하기에 어느 정도 워킹맘들의 고충이 이해가 된다.

     

나 혼자만 책임지는 인생이 아니라 내 가족을 책임지는 일이 바로 결혼과 육아다. 가끔은 죽을 만큼 힘들지만, 그만큼 행복하기도 하다. 우리에겐 결혼하고 출산하는 일은 선택의 문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요즘 세상엔 결혼하는 것도 어려운데 세상에서 이혼율 1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정을 끝까지 지키는 건 더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결혼했으니 이제 앞으로 도전할 일은 지금 내가 꾸린 가정을 지키는 일이다. 내 인생의 2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직 미혼이라면 결혼과 육아라는 인생 2막에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많이 힘들기도 하지만 행복한 일이니까 나누면 두 배가 될 거라고 믿는다. 이러면서도 속마음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들린다. 예전에 선배 교사가 했던 말이다. ‘나만 당할 순 없지.’ 농담이니 웃어넘기며 오늘도 최선을 다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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