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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Dec 14. 2020

<36> 평생직장에서 찾아온 인간관계 위기

열 명의 친구를 만드는 것보다 한 명의 적을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

노자의 도덕경 79장을 살펴보면 ‘天道无親(천도무친), 恒與善人(항여선인)’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하늘의 뜻은 편애하는 일 없이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에 선다.’라는 뜻이다. 즉, 이해관계보다 인간관계가 당연히 우선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대부분은 이해관계로 인간관계가 맺어진다. 그렇기에 아무리 가깝고 잘 알고 지내도 이해관계가 변하면 헤어지는 것은 순간이다. 게다가 큰 원수는 다 가까운 사이일 때 맺어진다. 이해관계가 우선이 아니라면 그럴 수는 없다. 그만큼 대학에서 혹은 사회에서 내 마음을 다 줄 수 있는 만큼 가까운 친구 한 명을 사귀는 건 쉽지 않다.      


공적으로 관계를 맺는 거보다 사적으로 관계를 맺는 게 더 쉽다. 내가 아무리 불편한 사람을 만나도 관계를 형성하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생 자신이 근무할 직장에서는 피하고 싶어서 업무에 엮이고,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면서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관계를 개선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수십 년간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이 생각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의 99%는 관계다》의 저자인 이현주 임상 심리 전문가는 누군가 불편한 사람이 있을 때 상대방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했다. 그 이유는 서로 살아온 인생 경험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지어 “완벽은 불가능한 목표다.”라고 언급하며 세상엔 완벽한 사람이 없으니 상대방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했다.      


과학 시간에 배우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아는가? 이를 인용한 “또라이 보존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이는 내가 속한 집단에는 어디에서든 ‘또라이’ 한 명은 꼭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또라이’는 과장된 표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불편한 상황을 만드는 트러블 메이커를 의미한다. 근데 만일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혹시 본인이 그 ‘또라이’일 수 있으니 잘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물론 사회성 결핍으로 인해 불편함을 주는 사람일 수도 있으나 사실 그 사람은 그 집단에 있는 사람들과는 성향이 많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성세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 요즘 세대 젊은이가 새로 들어왔다고 가정해보자. 선배가 말하면 항상 긍정의 대답을 하는 기존 문화를 거부하고,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신입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이 집단에서는 이 ‘신입’이 ‘또라이’가 되고 ‘불편러’가 된다.      


반대로 집단 구성원 중에 소수의 상급자만 기성세대이고, 대부분 요즘 세대의 문화를 따르는 직원들의 수가 많다고 가정해보자. 이때는 젊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권위를 내세우며 자신의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사람은 일명 ‘꼰대’가 된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풍자하려고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두 가지 가정을 통해서만 봐도, 우리가 어느 집단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불편한 사람’의 기준이 바뀐다. 다시 말하면, 나도 누군가한테는 불편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살면서 사실 나는 인간관계로 인해 힘든 적이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그런 성격은 아니라서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로 지냈다.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과 동등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니 더욱 그럴 일이 없었다. 군대에서는 상하 관계가 분명하니까 불편해도 싫어도 참을 수 있었다. 근데 교사가 되고서는 관계에 대한 가치 갈등이 일어났다. 만일 내가 회사에 다니고 있다면 직급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학교에서는 관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직급이 같은 ‘교사’인데 그렇지 않은 현실에 마주해야만 했다.      


동등함, 공평함이라는 말에 대한 기준은 매우 모호하고 주관적이다. 사람을 딱 절반으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다. 일하다 보면 누군가는 조금 더 고생하고, 희생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서로 배려할 때는 이 비율도 어느 정도 공정하게 맞출 수 있다. 어느 해에 누가 더 고생했다면 다음 해에는 그 사람에겐 부담을 줄여주면 된다. 이상적인 모습은 이런 거지만, 현실은 많이 다른 것 같다.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경력이 적다는 이유로, 아직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다. 학교에서는 매년 수업 시수를 계획하는데 이때 많은 일이 생긴다. 여러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어느 곳에서도 이와 관련된 회의할 때면 아름다운 마무리를 본 적이 없다. 1년 동안 자신의 수업 시수, 수업 준비 차시, 그리고 문제 출제 양까지 모두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정말 천사 같은 사람들도 이 회의 때는 자신의 밥그릇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전투적으로 변한다.      


물론 몇 명은 공정함을 기준으로 삼고 고생을 많이 했던 사람에게 다음 해에는 조금 부담을 줄여주려고 대신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목소리를 더 크게 내는 사람이 승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처음에는 굳이 그런 일로 싸우기 싫어서 호의를 베푼다. 근데 호의로 한 일이 계속 당연한 일로 여겨지면서 반복되면 평화주의자였던 사람도 부글부글 속이 끓기 시작한다. 그래도 “내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심정으로 계속 힘든 일을 맡는다.      


큰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보다는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하고 말지’라는 식으로 처음에는 시작한다. 근데 이들도 사람이기에 약간의 기대심리가 있다. ‘언젠가는 내 고생을 알고 바꿔주겠지’라는 생각 말이다. 근데 웃기는 건 아무리 희생하고 고생해도 이런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건 불만이다. 정말 아이러니하다. 근데 실제 그런 일을 겪는 교사를 많이 봤다. 이는 마케팅 이론 중 기대-불일치 이론으로 설명된다.      


심리학자 리처드 올리버는 “성과가 기대보다 높아 긍정적인 불일치가 생기면 만족이 발생하고, 반대로 성과가 기대보다 낮으면 부정적 불일치가 발생하여 불만족을 가져온다.”라고 했다. 예를 들어, 불만족스러운 제품을 반품할 때 제품 원상태를 유지하고 영수증까지 가져갔는데 매장 직원이 불친절한 태도로 대하면 실망과 불만족을 얻는다. 반면 제품상태도 포장이 뜯어졌고, 영수증도 잃어버렸는데 직원이 매우 친절하게 반품 처리를 해준다면 만족을 느낄 것이다. 모두 기대에 따른 불일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인간관계에 비유해보면, 항상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에게 내 부탁을 당연히 들어줄 거라 믿고 말을 걸었는데 거절당했을 때 오히려 그 사람에게 실망하고 불만족스럽다고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사람에게 불친절하고, 화를 잘 내고, 괴짜 같은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의외로 나에게는 친절할 때 만족스러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여도 나에게는 괜찮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없나 보다. 성향이 다르면 언젠가는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가는 상황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특정 인물에 대해서 좋지 않은 평가할 때 나는 선입관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일부러 건강상 유의해야 할 사항이 아니면 작년 담임 선생님한테 내가 만날 학생에 대해서 굳이 묻지 않는다. 별로라고 평가받던 아이 중에도 나와는 잘 맞아서 좋게 변화한 아이도 있었고, 졸업할 때까지 잘 버텨준 아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신 있게 내 방식대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성향이 맞으면 남들에겐 좋지 않아도 나에겐 좋은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성향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사람도 나랑은 안 맞는 거다. 모든 건 상대적이니까 말이다.     


교사 중에도 조심해야 할 사람에 대해서 주변에서 말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처음에는 소신 있게 관계를 맺고 싶어서 조언을 그리 크게 새겨듣지 않았다. 실제 다른 사람한테는 엄청 심하게 화내고, 소리치고 하면서도 내게는 그러지 않았다. 근데 막상 내가 상처 받는 일을 당하고부터 다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가 됐다. 계기를 자세히 적고 싶지만, 이 글을 읽고 누군지 밝혀지게 될 거 같아서 말을 아껴야 할 듯하다.      


간단히 말해보자면 그 사람이 나에게도 다른 사람한테 하듯이 막 대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동등한 교사 관계인데 마치 상급자가 하급자를 찍어 누르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라서 당했다는 느낌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꼬투리를 잡아서 일방적으로 공격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 사람은 나와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태도가 미온적이라 서운했다는 거다. 바로 아까 말한 기대-불일치 이론이 적용된 거다. 그 사람은 내가 더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 더 살갑게 대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느꼈던 거다. 자신의 기대와 성과가 불일치하여 불만족 상태가 된 것이다.      


왜 나한테 그렇게 대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을 때는 나도 그 사람이 죽을 정도로 미웠다. 근데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니까 자꾸 몸이 아프고, 가족 중에 누군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내가 부정적인 생각과 기운을 계속 품으니까 안 좋은 일이 발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근데 어찌 됐든 사립학교에 있으니 평생 볼 사람인데 계속 미워할 수는 없었다. 다시 친하게 지낼 수는 없어도 관계를 악화시키면 안 되겠다 싶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인간관계로 고민하고,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연애 다음으로 어려운 도전이었다. 근데 연애도 잘 해냈으니 이 문제도 잘 해결하고 싶었다. 나도 그 사람에게 원인을 제공한 것 같아서 처음에는 다시 잘 지내볼 마음으로 더 잘해주려고 노력했다. 근데 그럴수록 더 편하게 막 대하는 그 사람의 모습에 상처를 받았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가 다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괜히 상처 받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다고 말이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말한 ‘고슴도치 딜레마’를 통해 해결책을 찾았다. 추운 겨울, 고슴도치들이 모여 있었는데 서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들의 바늘이 서로를 찔러서 결국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추위로 다시 고슴도치들 모여들었고,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한 고슴도치들은 서로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발견했다. 이 광경을 본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고슴도치와 같다. 너무 가까이하면 가시에 찔리고 너무 멀리하면 추워진다.”라고 비유한 것이다.      


개인적인 욕심이라면 나는 모든 사람과 잘 지내고 싶었다. 아쉽게도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신 적은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대 중국의 성인 한비자도 “열 명의 친구를 만드는 것보다 한 명의 적을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는 말도 결국엔 적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지 않은가. 맑은 물도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흐린다. 따라서 내 인생도 한 사람의 적 때문에 망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니 사람들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에게 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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