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작업실에서
본능역의 마지막 종착지인 1번의 세계로 향한다. 8번보다 더 까다롭고 9번보다 더 신중하다. 우리는 다시 약간의 긴장을 할 필요가 있다. 본능역의 그들에게는 모두 절대 건드려서는 안되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
어떻게 알았는지 1번은 우리가 내릴 문 앞에서 반듯하게 서 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재밌게도 본능역의 사람들 인사 방식이 모두 다르지 않는가. 8번은 악수를 9번은 목례를, 1번은 바르지만 딱딱한 형식적인 인사를 한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하나 해내고 바로 다음 임무를 확인한다. 지체없이 시계를 살피며 우리를 하얀 색의 근사한 건물로 안내한다. 놀랍도록 순백의 색이 아닌가.
우리는 하얀 건물의 입구로 들어섰다. 외벽만큼이나 내부도 깔끔하고 정돈되어있다. 자로 잰듯이 놓여져 있는 물건, 철저하게 계산되어 걸려있는 작품들, 나는 이곳에 올때마다 그의 치밀함에 혀를 두른다. 이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1번의 작품이다. 실수로 그가 배치해둔 것들을 건드려 흐뜨러지게 하지 말자. 이것이 그의 영역이다.
작품
그의 작품은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하나는 모두 액자같은 틀 안에 있다는 것이고, 하나는 작품들이 모여 또 하나의 큰 작품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저기 모자이크처럼 여러개의 작품들이 모여 거대한 벽면을 채우고 있지 않는가. 빼곡히 작품으로 채워져 가고 있는 그 하얀 벽면은 고개를 완전 젖혀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1번은 이 벽면을 마치 퍼즐처럼 자신의 작품으로 남김없이 가득채울 생각인가보다.
1번은 ‘내면의 벽면을 자신의 작품으로 퍼즐을 완성해가는 사람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상향을 향해 삶으로 그것을 채워가는 것, 그것이 그들의 숙원 사업이다. 그는 조금의 빈틈도 없이 채우기 위해 반듯한 ‘틀’을 만든다. 그것은 무결점의 반듯한 틀이다. 이 틀은 거대한 벽면에 딱 들어맞으며 그것과 닮아있다. 이상향과 닮은 작은 ‘정의’ 그것이 1번이 집착하는 틀이다. 작품이 존재하기 전에 이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틀의 단단함과 올바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속에 형형색색의 작품을 넣더라도 그 틀이 삐뚤어져 있다면 그것으로 벽면을 완전히 채울 구 없기 때문이다.
제단실
1번은 자신의 틀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 틀을 어떻게 작품으오 채워나가는지 보자. 하얀 벽면의 옆 벽면에 작은 문이 있다. 1번은 그 앞에서 문을 열고 우리를 바라본다. 어서 가보자. 이곳은 그의 작업공간이다. 이곳마저 반듯하고 완벽하다. 이제는 1번과 거리감이 느껴진다. 물론 농담이다.
저기 여러 색의 천들이 널려있다. 자 바로 저 천이 1번의 ’인생‘이다. 그는 그것을 하나 가져와 연필과 자로 제단하기 시작한다. 그의 천에 그려진 올곧은 선, ’계획‘이다. 그렇다 계획은 정의라는 틀에 인생을 퍼즐 모양으로 잘라 줄 제단선 같은 것이다. 이곳에서 비정형적인 형태의 삶을 통제가능한 형태로 가공한다. 작업 중인 1번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잠시 멀리 떨어지자.
한참 작업에 열중하던 1번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나 보다. 그의 틀이 약간 틀어졌나보다. 그는 날씨탓을 하기 시작했다. 습도에 의해 그것이 틀어졌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는 좀처럼 자신이 잘못 작업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다보면, 이미 하얀 벽에 걸려 있는 수 많은 작품들이 의미 없는 것들이 될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틀을 만들 때 그 어느때보다 집중한다. 그것이 그들의 자존심이자 자존감이기 때문이다.
창고
그는 자신이 실패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가지고 작업실 구석에 있는 문으로 향한다. 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문을 연다. 그는 그곳에 한참 서서 문 안의 방을 들여다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이곳을 들어서자 그는 처음으로 인간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짜증, 슬픔, 분노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작업실안의 또 하나의 공간, 이곳은 ’버려진 기억의 창고‘이다. 이곳마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그가 실패작으로 규정한 작품들이 실패의 원인에 따라 분류되어 있다. 나는 가끔 그가 무섭다.
이곳의 존재는 그의 아킬레스건이자 그가 더 완벽한 틀을 만들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1번의 영원한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그가 자신의 실수를 잘 인정하지 않고 틀에 맞춰 남을 판단하는 성향은 이 고통의 방에 들어서는 것이 무섭기 때문이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하얀 벽을 뒤로하고 이 방에서 무너진다.
1번의 빛
창고에서 정리를 마친 1번은 작업실로 나왔다. 그는 무려 24자리의 번호를 누르고 금고에서 광원구를 꺼낸다. 당신의 조각에 비춰보자. 혹시 당신의 가장 큰 조각이 그것에 반응한다면, 당신은 1번 유형일 것이다.
1번의 내면세계는 고결하고 치밀하다. 그래서 그들은 규칙적고 정확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선의 기준이 명확하고 바르기에 바르고 솔직하다. 수 놓은 듯 빼곡하게 채워진 그의 작품들은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그들은 자신의 거대한 벽에 취해 우월의식을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가 만든 틀 안에서 상대를 규정하기도 한다. 이것은 틀이 완벽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 받고 싶어하는 심리이다. 이들은 그 틀이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반듯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할 때 그들의 세상은 더 유연해지고 평화로워진다. 또 창고를 압박의 공간으로 인식하기 보다 경험의 공간으로 인식한다면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과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