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생각해야 할 것
11월 초 고등학교 친구들과 홍콩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가기 위해 1년 전부터 서로 휴가를 맞추고, 돈을 모으고, 가서 뭘 먹고 무얼 할지 논의해 왔으니, 그 유종의 미로 점심(마음의 점)을 찍는다는 데서 무척 즐거운 여행이었다. 기대대로 여행은 무척 훌륭했다. 유명하다는 식당들의 점심(딤섬)들은 입이 황홀했고, 과거 영국령 시절의 유산 때문에 수준 높은 디저트 가게가 넘치게 많아 아무 가게나 들어가도 손해 본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영어에 능숙한 호텔 직원들의 빈틈없는 서비스도 큰 만족감을 주었다. 홍콩 여행을 점수로 매기자면, 내가 몇 번이고 휴대전화를 잃어버릴 뻔해 일행에게 민폐를 끼친 것을 제외하면 100점 만점에 90점은 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시시콜콜한 여행 이야기는 그만하려고 한다. 어느 집 딤섬이 맛있고, 어디가 풍경이 예쁘고 어디 쇼핑몰에 가면 눈과 입이 귀에 걸릴 만한 물건들을 늘어놓고 파는지는 인터넷 블로그에 흔하디흔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주윤발이 지폐에 불을 붙이며 폼을 잡던 홍콩, 지금도 주성치와 매염방, 양조위와 임청하가 걸어 다닐 것 같은 홍콩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런 영화에 취미가 크게 없는 데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사람이 이야기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더 쓸 필요가 없다.
그러면 혹자는 정말 답답해 따질 것이다. “그럼 너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가. 이 시대 홍콩에서 글로 파낼 새로운 이야기가 존재하는가. 관광객 주제에 무슨 새로운 이야기를 찾을 수 있겠냐”라고 말이다. 이렇게 물으면 나는 확실히 답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가 홍콩을 생각할 때 한 번쯤 기억해야 할 것은 있다"라고. 바로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의 주역 조슈아 웡과 아그네스 차우다. 이들은 중국판 국가보안법인 범죄인 인도법에 맞서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 나선 사람들이다. 연인원 백만 명 이상이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그 투쟁에서 조슈아 웡은 ”10년 후 초등학생들이 홍콩 민주화를 위해 시위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시위가 중국 정부의 탄압으로 사실상 실패로 끝난 후 구금되어 아직도 재판 중이다. 다른 지도부 한 축이었던 아그네스 차우 또한 보석 석방에는 성공했으나, 중국 정부의 탄압으로 캐나다로 망명했다. 앞으로 혁명적인 격동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들이 다시 홍콩의 거리를 안심하고 활보하는 날은 좀처럼 오지 않을 것이다. 슬픈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관광객으로서 아무 생각 없이 빼곡한 빌딩 숲을 바라보면서 걸었던 홍콩 몽콕 도심과 센트럴은 한때 이들이 아무 걱정 없이 활보했던 공간이자, 친구나 연인과 일상을 이야기했을 공간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모르긴 몰라도 나도 조슈아 웡과 아그네스 차우가 휴대폰을 보며 서 있을 몽콕 어느 횡단보도에 한 번쯤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도 홍콩 영화 속 장면을 생각하며 유명 관광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한 번은 바라봤을지도 모르겠다. 또 바쁜 일과 속에 줄 서서 기다리던 햄버거집도, 홍콩에서 일상적인 식사 공간이라는 유명 차찬텡 어느 한 자리에도 다녀가지 않았을까. 따라서 관광 분위기에 열 번을 시시콜콜하게 웃고 떠들고 먹더라도 한 번쯤은 그들을 생각해주는 것이 예의인 듯 싶다. 과거 한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이 그랬듯, 이들에게도 언젠가는 새벽이 지나고 밝은 날이 올 것임을 생각하고, 응원해야 하지 않을까. 이게 내가 홍콩 여행에서 찾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다.
사실 이 글은 홍콩 여행을 다녀와서 11월 중순쯤 완성했다. 글을 여러 편을 써놓고 계속 들여다보며 적절한 감정으로 익을 때까지 묵히는 편이라 발표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 12월 3일 대통령이 난데없는 비상계엄을 선언해 버렸고 온 나라가 난리가 났다. 국회에 군대를 밀어 넣은 대통령을 탄핵하라는 국민의 요구를 여당이 무시하면서 사태는 더욱 커졌다. 11월에 글을 쓰던 나는 마치 한국의 민주주의가 홍콩보다 우월한 양 “밝은 날이 올 것”이라는 둥 주책없이 글을 써버린 모양새가 돼 정말 계면쩍게 되어버렸다. 결국 원래 결말에서 한 문단을 더 덧붙여, 상황을 안일하게 봤던 것과 한국의 민주주의가 홍콩만큼이나 어두워진 데 대해 구구절절 변명해야만 하게 됐다. 한국은 그래도 다시 밝아질 수 있을까. 여의도를 가득 메운 젊은 시위대에게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