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는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 중식이 <나는 반딧불>
나는 마지막 대학 운동권이었다. 교사가 되겠다며 사범대에 진학해놓고 4년 내내 ‘데모’에 열중했다. 1학년 때는 봄가을에 반미 집회를 다니고 여름에는 농활을 갔다. 그때 학과에서는 ‘임용고시 방학 특강’ 같은 걸 개강하곤 했는데 다들 내가 공부를 안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나한테 “그 수업 들을 거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나는 서울에서 방학 특강을 위해 친히 내려온다는 유명 임용고시 학원 강사보다, 한총련 회장을 영웅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군 제대 후 복학해서는 좀 더 실용적인 데모꾼이 되고 싶었다. 그 시절에는 등록금 인상 반대 집회가 한창이었다. 나는 잽싸게 학내 집회 세력에 합류했고, “등록금에 깔려 죽겠다”며 서울에 올라가서 대학로부터 광화문까지 늘 쫓기며 달렸다. 그때 나는 꿈꿨다, 불효하는 길이긴 하지만 이러다 보면 훌륭한 활동가가 되어 있을 거라고. 그런데 이 꿈은 얼마 못 가 보기 좋게 깨졌다. 고교야구 선수가 프로 구단 지명에 실패하듯, 어딜 기웃거려도 나를 탐내는 단체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학교 4학년 때부터는 좀 더 현실로 복귀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후배에게는 학교 학생 식당 1층에서 3천원짜리 굴국밥을 뜨며 활동 중단을 선언했던 기억이 난다. 굴국밥은 맛이 썼고, 그날 낮 식당은 예상할 수 없는 내 미래처럼 한적하고 추웠다. 4학년 2학기 말이 되자 담당 교수는 내게 “졸업하고 뭐하고 살 거냐”고 물었다. 나는 막연하게 “출판사 가거나 기자 할 건데요”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기자는 해봐야 지방지 가면 감자나 고구마로 월급 받을 거고… 잘해라“라며 말을 아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어 시험 하나 제대로 봐둔 거 없는 처지에 이대로 졸업한다면 뭘 하겠나, 고구마를 월급으로 준다는 회사에 가야 할 것이다. 근데 그래도 나는 꿈은 컸다. 고구마를 월급으로 받아도 서울에서 받고 싶었다. 그렇게 가방에 반바지, 반팔티, 팬티 몇 장에 칫솔을 넣고 냅다 서울로 향했다.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조금만 고생하면 그럴듯한 일간지 기자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착각어린 포부를 품은 서울행이었다.
그러나 서울은 생각 이상 춥고 외로웠다. 겨우 잡은 한 달 삼십짜리 고시원 방에 틀어박혀 그 어떤 스펙도 없이 진라면이나 끓여먹는 나를 써주는 회사가 쉽게 나타날 리 없었다. 일간지 기자는 언감생심이고 맨입으로 내는 입사 원서는 줄줄이 낙방했다. 어떤 출판사 면접에 가서는 면전에서 "이런 학교 나와서 책을 만들겠냐"는 소리까지 들었고, 한 회사에서는 "왜 출판 학교를 나오지 않았냐"며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떨어질 때마다 마음이 우울했다.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길은 춥고 어두웠다. 엄마를 졸라 딱 백만원을 쥐고 기차를 탔기 때문에, 그 돈만큼이 서울 생활의 유통기한이고 기한 안에 해결을 못 보면 다시 대구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불러주는 회사면 어디든 가서 고시원 월세라도 벌어보기로 결심했다. 직원 3명짜리 출판사였는데 편집자 겸 마케터로 책을 하루에 전국에 2권 팔고 퇴근하는 일을 반복했다. 어떤 때는 1권도 못 파는 날도 있었다. 대표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아마 그날 점심 밥값이 회사 순이익보다 더 비싸지 않았을까. 그렇게 퇴근하는 날은 자괴감에 차비도 아까워 을지로입구에서 아현동 고개를 넘어 신촌 언덕 고시원까지 걸어갔었다. 생각해보면 재개발로 빈 가게가 즐비하고 쓰레기가 나뒹구는 아현 고개를 넘어가던 그날의 나는 별이 아니라 개똥벌레였다. 폐업한 웨딩숍 안을 굴러다니는 마네킹 두상들이 "니가 그럼 그렇지"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도 견뎠다. 빛을 내려면 하루를 벌지 않으면 안 되니까, 나는 그 하루에 힘을 잔뜩 주고서 결국엔 기진맥진하는 개똥벌레였다.
돌아보니 그렇게 꽁무니에서 빛이라도 내보려고 용을 써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사실 그동안 단 한 번도 별의 순간은 없었다. 결국 그렇게 원했던 일간 신문사는 계약직으로도 입사하지 못했다. 기사로 세상에 충격을 주는 대기자, 문단을 휩쓰는 대문호나 대편집자 따위는 애초에 생에 주어진 복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뒤를 돌아보자면 순간순간 빛을 내려고 애썼던 순간들이 밤길의 자동차 미등이나 가로등 불빛처럼 점점이 남아 있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라도 애썼기에 이제는 고시원에 안 살고, 가끔 내킬 때 치킨도 마음대로 시켜먹고 책도 사볼 수 있지 않나. 그러면 충분한 것이다. 밴드 중식이는 노래하지 않았던가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라고. 모두가 별일 수 없는 세상에서 나는 확실히 개똥벌레였다. 그래도 괜찮다. 각자의 빛을 내며 눈부시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다. 잘 살아온 내게 위로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