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에 남자가 주양육자인 것은 아무런 흠도 아닐 것입니다. 사정을 아시는 분들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감사하게도 많이들 칭찬을 해주십니다. 많지는 않지만 드문드문 남자 주양육자 동지분들의 소식을 들을 때도 있고요. 그만큼 이제는 남자가 육아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됐습니다. 그렇다고 남자 주양육자가 친근하지는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퇴사 후 살림과 현재 19개월 딸아이의 육아를 책임지고 있는 남자 주양육자입니다. 사회의 비주류가 되어 남자 주양육자로서 살아가는 제 삶과 저의 짧은 생각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떤 직업 앞에 '남', '여'와 같은 특정 성별이 붙어있다면 그 직업은전통적으로 특수한 하나의 성별이 해오던 직업이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그 전통을 깨고 반대의 성이 해당 직업을 갖게 된 경우 아무래도 전례 없던 일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기 위해서 새로운 성별의 명칭을 앞에 붙였을 것입니다.'여군', '여경', '남간호사', '남승무원' 같은 식의 것들이 그 예라고 볼 수 있겠죠. 저도 스스로를 '남자 주양육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요. 보통 주양육자는 이꼴(=) 엄마입니다. 다들 엄마라고 하면 당연히 주양육자라고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워킹맘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육아 및 살림에 대한 대부분의 의사결정과 케어는 엄마가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입니다. 아빠인데 아기를 본다고 하면 보통은 '잠깐 도와준다'라고 생각합니다. 남자가 육아휴직을 냈겠거니 하며, 어찌 되었든 엄마가 주로 아기를 케어하고 아빠는 옆에서 많이 도와주는구나라는 식으로 생각하죠. 저 또한 지금 제 상황이 되기 전에는 정확하게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희 집은 간단하게 말하면 정확히 반대 상황입니다. 아빠가 주 양육과 살림을 맡고 있고 엄마가 주 돈벌이를 합니다. 전통적인 성별이 바뀌었다 뿐이지 여타 가정과 비슷합니다. 대부분의 아침에 아빠는 새벽마다 깨는 아기를 케어하느라 주로 비몽사몽 합니다. 피곤한 몸을 비척이며 일어나 아침 일찍부터 아기 밥을 차려 먹입니다. 엄마는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섭니다. 아빠는 아기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밀린 집안일을 바쁘게 처리합니다. 집안일을 한바탕 하고 나면 운동을 가거나 장을 봐옵니다. 엄마는 열심히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또 오후 내내 열심히 일을 합니다. 여러 클라이언트 회사에 미팅을 다니며 회의를 주관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내부 결재를 받느라 정신이 없죠. 아빠는 시간이 되면 어린이집에서 아기를 하원시키고 아기를 돌보기 시작합니다. 때때로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기도 하고 바로 집으로 들어오기도 하죠. 집에 오면 아기를 씻기고 또 저녁을 먹입니다. 엄마는 대부분 야근을 합니다. 심지어 직장과 집이 편도 2시간 거리이기 때문에 조금만 야근을 해도 집에 오면 9시, 10 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빠는 9시가 넘으면 아기를 재우기 시작합니다. 아내가 조금 일찍 오면 아기와 놀아주기도 하지만 보통은 기운 없어해서 아내가 오기 전에 최대한 재우려고 합니다. 아내는 평소보다 힘든 날이면 아기를 꼭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종종 아기를 깨웁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아는 아빠는 이해는 하지만 속이 뒤집어집니다. 아기가 잠들면 부부는 같이 늦은 야식을 먹고 잠에 듭니다.
저희 보통의 날들입니다. 저는 전통적인 엄마의 삶을 살고 있는 아빠이며 아내는 전통적인 아빠의 삶을 살고 있는 엄마이죠.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살게 되었는지를 먼저 설명드리는 게 맞겠죠? 간단히 거두절미하자면 "우리 집의 주방살림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ㅎㅎ 저희 아내는 간단한 정리 외에는 살림 능력이 전무합니다. 아내는 저랑 동거를 시작한 뒤 지금까지 약 6년가량의 기간 동안, 주방에서 음식을 하거나 설거지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비위가 약해 음식물이나 일반 쓰레기 처리도 잘 못하고 할 줄도 모릅니다. 아내에게 집안 살림을 맡기면 아마 1주일도 채 되기 전에 청소 전문가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ㅎㅎ (아내를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ㅎㅎ 대신에 열심히 돈벌이하고 일하느라고 늘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생합니다. ㅠㅠ) 원래부터 살림과는 정반대에 있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죠. 반면에 저는 혼자 지낼 때도 간단한 조리 정도는 해보았을 정도로 주방살림에 큰 거부감은 없었습니다. 또 청소와 기본적인 집안일도 곧잘 하는 사람이었죠. 사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기본적인 청소와 살림은 어느 정도 할 줄 알 것입니다. 집안일의 ㅈ자도 모르는 그런 아내가 귀여웠습니다.(지금도 여전히 귀엽습니다. ㅎㅎ) 제가 케어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감사했고요. 그래서 연애시절 때부터 더욱 신이 나 아내의 생활적인 부분을 늘 챙기고 케어해 주면서 지내왔습니다. 각자 직장을 다녔지만 함께 살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음식, 청소, 빨래할 것 없이 집안일의 거의 모든 부분을 제가 책임지고 살았습니다. 아내는 저의 전두지휘 하에 세탁기나 청소기 돌리는 정도의 일을 도왔죠. 두 명 살림이었고 둘 다 일을 하니 사실 집안일이랄 게 별게 없었기도 했고요.
그러던 어느 날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크나큰 고민이 들더군요. 아내가 출산을 하면 돈벌이는 내가 해야 할 테니 여타 다른 집과 같이 앞으로는 아내가 살림과 육아를 담당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 살림은 내가 한다고 치고, 그럼 아기 케어하고 먹여 살리는 일련에 일들을 아내가 해야 하나? 할... 수가 있나...? ㅋㅋㅋ 아내도 같은 종류의 불안감이 엄습한 것 같았고 이제 아기를 낳으면 본인이 살림하고 애 키워야 하냐며 불안해하며 묻더군요. 어른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질문일 수 있겠습니다. 그럼 당연히 엄마가 애를 키워야지 무슨 그런 질문이 있냐고 하시면서 호통을 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 생활 살림 대부분을 제가 책임지고 있었던 터라 저 또한 아내가 살림하고 애 키우는 게 상상이 안 가더라고요. 고심 끝에 제가 육아와 살림을 담당하기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개인적인 일로 인해 예상보다 빨리 일을 그만두게 되어서 아내의 임신케어도 함께 하게 되었네요.
보무도 당당하게 육아를 담당하겠다고 선언했던 것 치고는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나름 건강한 멘탈을 자부했던 사람인데 쉴새 없는 신생아 케어와 부족한 잠은 그 멘탈을 처참하게 찢어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여타 애 키우는 엄마들과 같이 시댁문제(저에게는 처가댁문제), 남편과의 잦은 싸움(저에게는 아내와), 사회적인 고립 등이 계속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남자다 보니 육아동지를 만들 수가 없어 그 어떤 곳에도 제 상황을 얘기할 수가 없더군요. 그렇게 1년이 지나니 육아 우울증이 왔습니다.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기가 16~17개월쯤 되어서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니 기적처럼 나아지더군요. ㅎㅎ 어린이집은 사랑입니다. 그렇게 숨통이 좀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좀 스스로를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런 의미로 그동안 미뤄두었던 글쓰기를 다시금 시작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