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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걸 Jun 01. 2016

곡성 리뷰 - 강스포(시나리오 수준)

이상하네 택배이야기 써야되는데

가끔 한 다리 건너 남의 집 가정사를 듣곤 한다. 아무래도 와이프를 통해 듣는 경우가 많고 와이프는 아무래도 여성적 관점에서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고로 난 다른 집의 남편들을 잘 모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나쁜놈인가" 라고 생각을 하다가 수일이 지나면 "나쁜놈이구만" 이라고 판단을 하게 된다. 그 사이사이에는 그 남편들에 대한 단편적 단서들이 수집된다. 술 먹고 늦게 온다더라,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답시고 대출만 많아지고 무책임해졌다더라, 손찌검을 했다더라.... 내 안에서 일면식도 없는 그 남편은 어느새 쓰레기가 된다.


영화이야기는 안하고 무슨 이야기냐고? 이게 곡성을 관통하는 스토리다.


성경구절 자막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예수가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귀신이냐며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한 이야기다.


-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만져보아라 나는 뼈와 살이 있다 -


지루하기까지 한 시골마을에 일가족을 몰살하는 살인사건이 나고 용의자들은 강한 피부 종양이 있고 모두 눈이 풀려있다. 국과수에서는 독버섯이라고 판명이 난다.


그즈음 마을에 얼마전 일본인이 전입온 후 일련의 사건들이 나지 않았냐는 흉흉한 소문이 돈다. 훈도시(일본 전통 팬티?)차림으로 덫에 걸린 노루를 생으로 파헤쳐먹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종구는 코웃음을 치지만 점차 논리로는 설명이 어려운 사건들을 보며 의구심을 가질때쯤 종구의 딸에게도 이상증상과 더불어 피부 종양이 일어난다.


영화는 시종일관 팩트를 늘어놓고 팩트 사이에 소문들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관점에 따라 달라보일 수 있는 연출들을 나열한다.


인간은 동물 중에서는 가장 냉철하나 허무하리만큼 맹목적이 될 때가 <신>이 개입될때다. 시장에서 천 원을 깎는 어머니들이 교회가서는 십일조를 내고 세금 한 푼 아껴보려 현금을 선호하시는 분들도 절에 가서 치성을 드리며 암의 권위자인 의사가 시한부 판명을 내려도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게 인간이다.


곡성은 사실과 소문, 그에 혹하는 인간의 내면을 이 <(귀)신> 이라는 장치를 삽입함으로써 타당성(?)을 얻었다.


나홍진이 똑똑한 감독이라고 느낀 건 잠시 방심하면 클리셰가 될 수 있는 서사에서 좀비와 엑소시스트를 결부시킨 장면에서였다. 검은 사제들이라는 영화로 한국영화에서 보기드물었던 고퀄의 엑소시즘을 선보였는데 (강동원의 미모로 더 유명했던 게 함정) 곡성은 서구 영화의 산물이라고 이미지가 박힌 좀비를 접목했다. 결과적으로는 영화의 맥락이 귀신이라는 허상에서 결말에서 실체화되는 악마 사이의 훌륭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고 본다.


우연히 만난 무명은 일본인이 귀신이라며 언질을 준다. 무명은 이름에서부터 하얀 소복 차림이며 말투며 모든 것이 비실체화된 느낌이다. 종구는 이 무명에게 현혹된다.


악화되는 딸을 보며 야마가 돌아버린 종구는 일본어가 가능한 친구 조카인 신부님을 데리고 일본인을 찾아가 꺼지라며 깽판을 치고 일본인은 시종일관 의미심장한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흥분해 날뛰던 종구는 일본인이 키우던 개를 곡괭이로 죽이고 돌아와 일광을 불러 굿을 한다.


영화는 여기 중반까지 마을 사람들을 현혹하는 소문이며 연출이 모두 일본인이 귀신이라는데 관객을 집중시킨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 무당인 일광이 훈도시를 입고있는 장면이 잠깐 스쳐간다. 후에 일광과 일본인이 한 맥락으로 맺어져있는 복선.


일광이 굿을 하는동안 아이러니하게 종구의 딸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같은 시각 일본인도 의식을 치른다. 연출상으로는 일광과 일본인의 대결구도이다. 일광의 굿이 정점에 이를때 일본인은 기싸움에서 패한듯이 괴로워하며 뒹굴고 그 집 앞을 무명이 지나간다. 같은 시각 괴로워하던 딸을 보다못한 종구는 굿판을 뒤엎으며 중지시키고 일본인은 구사일생한다(는 듯이 연출된다)


종구는 일본인을 죽이겠노라며 마을 친구들과 일본인의 집을 찾지만 일본인은 없고 사라졌던 두번째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좀비가 되어 나타난다. (트럭 안에서 구더기가 끓어 방치되어 있었는데 일본인이 의식을 치르는 그 날 밤에 살아(?)난다.


이 좀비씬은 일광의 대사로 이해된다.


"내가 살을 날릴 것이여. 그런디 부정한 짓을 해불믄 역살을 맞어분께 먹는 거, 입는 거 조심혀"


즉, 살을 날리는 과정에서 종구가 중단시켜 역살을 맞는 과정에서 좀비가 탄생했다고 나는 이해했다.


대낮에 좀비와 격투를 벌인끝에 좀비는 죽고 다들 기진맥진해 있을 때 도망가는 일본인을 발견하고 그 뒤를 쫓는데 절벽 낭떠러지에서 일본인은 사라지고 종구 일행들은 차를 타고 돌아간다. 일본인은 절벽에 매달려 있다 떨어지고 서럽게 운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이 가졌던 의심이 일관성이 붕괴된다. 아 저 일본인이 귀신이 아니라 오해를 받은 평범한 늙은이였단 말인가.


그리고 무명이 나타나 산 위에서 일본인을 떨어뜨려 하산하는 종구의 트럭에 부딪혀 죽음에 이르게한다. 종구 일행은 죽은 일본인을 산 밑으로 떨어뜨려 유기한다. 무명은 뒤쪽 산등성이에서 이를 지켜본다.


그리고 관객들의 의심은 자연스레 일본인에게서 무명으로 환기된다. 저 여자는 뭐지. 귀신인 줄 알았던 일본인은 죽어버렸네. 저 무명은 이 원흉을 일으킨 귀신인가 아니면 수호신인가.


그 때 일광이 다급하게 사라진 딸을 찾으러 나선 종구에게 전화를 한다.


"내가 점을 잘못 봤네. 일본사람이 아니라 그 여자가 귀신이여. 그 여자를 믿으면 안되네. 지금 빨리 집에 가야돼. 안그러면 다 죽네."


딸을 찾던 종구는 마을 골목에서 무명을 만난다. 무명은 여전히 일본인이 귀신이라고 한다. 너희를 구하려 덫을 놓았으니 귀신이 덫에 걸리면 닭이 3번 울 것이다. 지금 집에 가면 너희 가족이 다 죽게되니 조금만 기다리다 닭이 3번 울면 가라 한다.


종구는 딸이 집에 돌아와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이 순간 일광의 말에도 현혹되고 무명의 말에도 현혹된다. 결국 닭이 2번 울었을 때 종구는 집으로 급히 뛰어가고 무명은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이 시점에서 무명은 마을의 수호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 하다)


선혈이 낭자한 종구의 집에 일광이 도착해 사체들의 사진을 묵묵히 찍는다. (일본인의 집에 있던 피해자들의 사진들과 맥락이 같다)


같은 시각 신부는 낫을 들고 산 속의 동굴로 향한다. 그 동굴에는 분명 죽었던 일본인이 모포를 뒤집어쓰고 덜덜 떨며 초라한 모습으로 주술을 외우고있다.


관객들은 이 결말부분에서 세번째 멘탈이 붕괴된다. 극 중 등장인물 뿐 아니라 관객들마저 세 번 현혹된 것이다.


일본인 - 무명 - 일본인으로.


중반부 종구가 일본인을 찾아갔을 때와

결말부 신부가 일본인을 찾아갔을 때


둘은 같은 질문을 하고 일본인은 같은 대답을 한다.


영화 도입부의 성경구절과 일맥상통하는 핵심이다.


"너는 누구냐"


"내가 무어라 대답해도 너는 믿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의심을 하고 내게 왔는데 네가 믿겠느냐"


일본인 노인은 대화를 하는 사이에 어느새 악마의 형상을 갖추고 있고 신부의 얼굴을 카메라로 찍는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재밌는 점은 악마를(실체화된 (귀)신) 대면한 신부의 얼굴에서 공포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만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나 죽은 뒤 3일만에 부활한 예수를 본 제자들이 느꼈음직한 두려움과 경외의 표정이 동시에 읽힌다.


곡성의 미덕

-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어떻게 그려내는가

-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믿어왔던 건 무엇인가. 실재인가, 실재였으면 하는 욕망의 투영인가

- 믿음이라는 것은 미혹과 과연 다른가, 우리는 과연 실재하는 진실을 중요시하는가

- 미친듯한 배우들의 연기, 딸래미의 미친 존재감.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이 쉬벌놈아

- 미친듯한 연출력, 온갖 부비트랩들이 널부러져 있고 회수되지 않는 떡밥의 지뢰들에 나(관객)은 만신창이가 되지만 시종일관 극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 <한국인, 일본인>, <신부님과 무당>, <귀신과 좀비>, <범죄스릴러와 엑소시즘>, <코메디와 스릴러>, <성경과 토테미즘>, <진실과 추문> 이 모든 것을 미학적으로, 상업적으로 버무려 완성한 다음 15세 관람가를 받고 칸까지 초청받은 다음 6백만 관중을 돌파할 수 미친 감독은 나홍진밖에 없을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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