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삼이와 나 #01 함정 카드는 설치됐다

매일 청소기를 돌리는 자 VS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이면 되는 자

by aka Sally
오늘 청소기 좀 돌리는 게 어때?


늦잠에 취해 오늘도 출근시간이 조금 늦어버린 훈삼이지만, 집안의 청결 상태 체크는 잊지 않는다.


어젯밤에 일찍 퇴근했다면 이미 위생 점검을 끝내고 유지보수까지 스스로 했겠으나 그러지 못한 탓이다. 점검이 끝난 훈삼이는 이어 나에게 업무를 몇 개 쥐어 준다. 물론 나는 승인하지 않는 것들이다.


훈삼이가 매일마다 주는 작업은 청소기 돌리기, 음식 쓰레기 버리기, 택배 상자 밖에 내놓기 등등 99.9% 청소와 관련되어 있다. 대개 '부탁한다'라며 전달하지만 역시 나는 승인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다 알정도로 훈삼이는 결벽에 가까운 위생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 먼지냄새를 유발하는 것들이다. 무협영화에서 처럼 허공에 떠 있는 먼지를 손가락으로 귀신같이 잡아낸다. 이럴 때는 인간 레벨이 아니다.


한 5분 전에도 '옷에 뭐가 많이 묻었어!!!!'하고 펄쩍 뛰며 놀라길래 찍찍이 테이프를 들고 달려가 보니 일반 휴먼의 눈에 라면 크게 보이거나 그릇되지 않을 실생활 먼지들이 검은색(요즘 말로 제트 블랙) 점퍼에 군데군데 붙어 있을 뿐이었다.


"자기야, 인간이라면 이 정도 먼지는 옷에 달고 살아. 순수 100% 블랙 인간이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의 성미를 알고 있으니 순순히 찍찍이로 먼지를 떼어주며 물어본다. 결혼 후 많은 과정에서 그를 바꾸어 보려고 노력해봤다. 너무 깔끔 떨면 돈이 안 들어온다거나, 오던 복도 나간다 등등 온갖 미신으로 그를 세뇌하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꼴을 보니 아직까지는 헛수고인 듯하다. 역시 사람은 고쳐쓰는게 아니라더니.


훈삼이는 곧 눈에 보이던 먼지가 해결되자 이번에는 분리수거하려고 쌓아놨던 박스와 종이봉투에게 접근한다.


분리수거일에 맞춰 밖에 내놓으려고 문 앞에 둔 종이상자나 봉투 등 지류더미다. 쓸만한 봉투를 잘 접어서 신발장 서랍 등에 집어넣고 박스를 접는 등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그를 보며 더 이상 훈삼이의 눈에 거슬리는 게 보일 경우 출근이 더 늦어질 수 있겠다 싶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나도 어거지로 청소에 참여한다. 미룰 때까지 미루어 두었던 설거지며 빨래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어찌 보면 우리의 평범한 아침 풍경이다. 계속해서 그는 뭔가 건들고 출근시간이 늦어질까 봐 나는 보조한다.


"자기야, 그런데.. 오늘 청소기 좀 돌리는 게 어때?"


꼬옥~ 한 마디 더 얹을 때. 이럴 때가 짜증이 나는 경우다. 훈삼이를 어르고 달래서 출근시키면 나도 출근 준비를 해야 하고 나름의 바쁜 여정이 시작되는데 부탁의 명목으로 업무 목록을 전달하는 것이다. 아니, 회사에서나 팀장이지 우리 집에서도 팀장인가?


게다가 그의 업무는 100% 청소와 관련된 것이므로 기분이 나쁜 것이다. 하고 싶은 자가 하시라.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천지개벽하여 벼락을 맞아 스스로의 동기로 청소를 하고 싶더라도 옆에서 누가 시키면 하기 싫어져, 이 사람아.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곧 회피 및 세뇌 스킬을 사용하며 피한다. 그럼 훈삼이를 매일 청소기 돌리게 하는 악덕 결벽증 환자로 몰 수 있다.


"어제 돌렸는데?"

"어제 돌렸어? 진짜로?"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반문하는 훈삼이가 뭔가 심상찮다는 걸 느꼈어야 했는데. 그래, 누가 보아도 바닥상태가 어제 청소기를 돌린 꼴은 아니었지. 하지만 내가 돌렸다는데 알게 뭐람. 돌렸다면 돌린 거지.


"돌렸어!"

"진짜 돌렸어?"


거짓말을 하려니 나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헤실대며 쪼개는 내 모습에 완전 범죄는 못되더라도 어쩌랴. 심증이 가더라도 물증이 없으면 구속은 불가능이야, 이 사람아!(물론 현실은 가능하다....)


진짜 돌렸어? 돌렸다니까! 끊이지 않는 핑퐁 대화를 한 후 훈삼이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자기가 청소기를 돌리고 청소기를 저렇게 세워 놨어?"

"그래! 내가 저렇게 세웠어!"


청소기와 로봇 청소기가 소중하게 놓여 있는 안방 모습

오늘따라 훈삼이가 왜 그러지 싶어 고개를 돌려 청소기를 보았다. 분명 어제도 그제도 내가 건든 적이 없으니 저렇게 세워져 있기는 하지. 뭐 특별할 것이 있나?


물론 나는 청소기를 쓰고 벽의 꺾이는 모서리 부분에 서게 세워 두는 편이지만 오늘따라 훈삼이의 애장품은 벽에 바짝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저것이 물증이 될 수 있으랴. 언제나 전투는 우기는 사람이 이긴다.


"진짜 자기가 저렇게 세웠다고?"

"그래!"


"....

.... 자기야, 내가 지난주에 청소기를 쓰고 자기가 만일 청소기를 쓰면 나만 눈치챌 수 있도록 설치해둔 것이 있어."


엥..? 훈삼이의 생뚱맞은 말에 청소기를 아무리 살펴봐도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도 그걸 건드리지 않았어."


무엇이 이상한지 찾아 보시오
넌 왜 굳이 커튼에 기대어 있니


.... 그래, 있었다. 훈삼이가 교활하게도 벽에 세워둔 다이슨 손잡이 부분에 커튼을 걸어 놓고 내가 청소기를 들면 커튼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있도록 설치해두었다. 청소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트랩 카드를 설치해둔 것. 장하다. 머리를 왜 이런데 쓰는 거야.


언제 이렇게 교활한 남자가 됐는가. 순수하던 훈삼이를 돌려줘!!!! 완전 범죄가 되어 훈삼이를 열 받게 할 수 있었는데 내 꾀에 내통수를 맞았다. 너무나 웃기고 짜증 나서 침대에 누워 온 사지를 흔들며 짜증 내는 나를 뒤로 한 채 훈삼이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떠났다.


웃어라.

그래도 나는 오늘 청소기 안 돌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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