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애들 아빠가 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마디 했다. “여보 그 바지 무릎이 너무 나온 거 아니야?” 그러면서 “그리고 바지를 뭐 그렇게 올려 입어? 크기가 너무 큰 것 같은데?” 그 바지는 둘째 출산 후 산 체육복이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도 이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모두 둘째 임신했을 때 산 옷들로 출산 후 살이 빠지지 않아 쭉 입었었다. 그때는 여성복이 맞지 않았다. 늘 남자옷 L사이즈로 구매했었다. 남자 옷은 밑위길이가 길어서 배 나온 나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그마저도 허벅지와 엉덩이가 끼었다.
그 옷들을 입고 작년에 줌바도 다니고, 그룹 pt도 받았다. 체중이 변하고 사이즈가 줄었지만 “빠져봤자 얼마나 변하겠어?”라고 생각했다. 10kg 빠지니 허벅지가 헐렁해졌다. 16kg 뺐더니 허리 품이 넉넉해서 연신 흘러내렸다. 몸이 “여자 사이즈”로 변하니 그제야 그 바지가 남자 바지임을 알 수 있었다. 앞이 툭 튀어나오고 라인이 없어 통짜로 내려오는 핏. 살이 빠질수록 입던 옷이 점점 흉해지는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자 보다 못한 애들 아빠가 한 소리 한 것이다. 결국 이실직고했다. 사실 이거 남자 옷에 L 사이즈라고. 이제껏 마누라가 남자 옷을 입고 다녔다니까 적잖이 놀란 눈치다. 다른 옷들도 그러냐길래 티셔츠들은 거의 그렇다고 했다. 체육복은 품이 넉넉해서 입고 다녀도 불편하지 않아서 그냥 입고 다녔다고 하니 경악한 표정이었다. 무릎도 너무 늘어났고, 펑퍼짐해서 별로라고 말렸다.
결혼 직후 내 몸무게는 60kg 전후였다. 그러다 큰어린이 임신하고 20kg 넘게 쪘었다. 출산 후 10kg이 빠졌지만, 작은어린이 출산 후 그 이하로 빠지지 않았다. 그 후 78~80kg을 오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집 안 정리를 하며 옷이나 신발, 세간을 처분했는데 내 옷의 지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작아서 입을 수 없는 옷을 하나둘 버렸더니 내 옷장엔 펑퍼짐한 남자 사이즈 옷과 “그래도 혹시 몰라서” 남겨둔 작디작은 <여자 표준 크기> 옷 몇 벌 뿐이었다.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큰 옷을 다 버렸더니 결혼 전 샀던 옷만 덜렁 남았다. 예전 같았으면 빈 만큼 채워야 한다며 단골 빈티지가게를 드나들었겠지만, 지금은 살림을 건사해야 해서 그냥 있는 옷들만 입고 있다. 애들 아빠가 살 빠졌으니 옷 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몇 벌 사 입으라 했지만, “그 돈이면 애들 겨울 잠바를 사는 게”, “옷 한 벌 살 돈이면 우리 집 일주일 식비인데”라고 망설이게 된다. 당장 내가 바지 한 벌 산다고 우리 집 살림이 휘청대는 것도 아니고, 옷을 10만 원 어치 산들 애들 아빠는 잘 샀다, 더 필요한 거 없냐고 하는 사람인데 자꾸 혼자 구질구질해진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뜻하지 않게 상품권 네 장이 생겼다. 그중 두 장은 장 보는 데 썼고, 두 장은 눈 딱 감고 체육복 두 벌을 샀다.
나는 항상 MEN에 가서 가장 큰 옷을 찾았다. 남녀공용은 L도 꽉 끼어 못산 적도 있었다. 여자인데 남자 코너 옷을, 그마저도 크기가 안 맞는 굴욕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8년 만에<Women> 코너의 옷을 골랐다. L사이즈를 덥석 집었더니 점원이 이건 크니까 M을 입으라면서 창고에서 옷을 가져다줬다. L이면 될 것 같아요. 나는 작게 말했다. 점원은 날씬하신 분이 뭐 하러 옷을 크게 입냐고, 이 옷은 본인 몸에 딱 맞게 입어야 맵시가 난다고 했다. 피팅룸에서 옷을 입어봤다. 쑥 하고 허벅지부터 허리까지 올라갔다. 오히려 허리가 커서 끈을 최대한 조여야 했다. 직원은 거보란 듯한 표정으로 S도 될 것 같은데 어떠냐고 권했다. 그것까지는 과욕인 것 같아 그냥 이걸로 사겠다고 했다. 정말 사고 싶던 바지는 사이즈가 L뿐이라 그것으로 샀다. 여자 사이즈L은 남자 사이즈 S보다 약간 큰 정도였다. 계산하는데 <여성용>이란 글자가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집에 오자마자 남자 옷을 다 버리고 새 옷을 집어넣었다. 아, 이제 여자로 돌아왔구나. 옷 사이즈만이라도 “여자”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