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랑이었어
내 첫 직장은 대기업이었다. 나의 직급은 ‘사원’, 신분은 파견직. 파견직은 아웃소싱 회사에 소속이 되어 대기업 계약직 업무를 수행한다. 소속은 아웃소싱회사, 근무지는 대기업. 겉으로 보면 그럴듯해 보였다. 업무도 전공을 살린 홍보 담당이라 더할 나위 없었다.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회사에 번듯한 업무, 홍보 업무다 보니 대외 활동이 많아 명함도 받았다.
가장 기뻤던 건 내 아버지와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85년도 입사하여 지금까지 근무하고 계신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회사에 대한 불만을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아무 탈 없이 일하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이냐?”, “회사 덕분에 우리 식구가 잘 사는 거다.”, “아빠 회사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아니?” 언제나 긍지와 자부심을 듬뿍 담아 말씀하셨다. 아버지 회사 동료들을 만나면 다들 “너희 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셔. 윗사람들에게 신뢰받고 동료들이 인정하며 낮은 직급의 사람들이 존경하는 분이시란다.”라며 아버지를 추켜 올렸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다들 그렇게 일한다고 칭찬을 일축했다. 자신의 성과와 칭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하면서 겸손을 겸한 아버지의 말이 되려 돋보였다.
그래서 난 아버지 회사가 정말 멋지고 좋은 곳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푸릇한 새싹을 키우고 나무를 튼튼하게 만들어 키우는 울창한 숲”인 줄 알았는데 그곳은 벌레와 짐승이 들끓는 정글이었다. 홍보 담당자는 나 하나였고, “너는 홍보해야 하니까”를 이유로 별별 일을 다 했다. 행사 진행, 소공연장 사전 MC, 청소, 표 검수, 안내, 의전, 민원응대, 사무실 손님 접대 등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 그저 다 내 업무라고 하니 그런 줄 알았다.
아버지에게 딱 한 번 푸념한 적이 있었다. 오늘 밥은커녕 화장실을 한 번 겨우 갔을 정도로 바빴다고. 키보드를 일 두드려서 손목과 손가락에 감각이 없다고 했다. 너무 아파 한의원에 갔는데 한의사가 맥을 짚더니 “뭐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냐, 온몸에 기력이 없는데 무슨 힘으로 여기까지 걸어왔냐?”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말도 더했다. 아버지는 “그래도 누가 찾아줄 때 일하는 거다. 다들 그렇게 일한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던졌다. 그날은 14일 간 내리 출근 하고, 다음날도 월차를 쓰고 오전에 출근해야 했다. 순간 울컥했다.
“아빠는 대기업에 정규직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지, 그렇게 해야지. 그런데 나는 대접도 못 받는 파견직이다. 머리 터지게 새로운 원고를 매일 써야 하는 고통을 알아? 계약직이랑 파견직은 회사 창립기념일에 쉬지도 않는다. 왜냐고? 나는 파견 회사에 소속된 파견직이라서 그날 나랑 계약직들은 출근해야 한다. 일할 때나 동료지 내 일을 해봤자 일 못하는 정규직들 성과로 내가 한 일을 자기 걸로 올리는 설움을 아빠가 아냐.”
이후 아버지와 나 둘 다 회사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녀 사이는 얼렁뚱땅 봉합되었지만 ‘정규직’과 ‘계약직’이라는 신분은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 퇴사가 확정된 날 모처럼 가족 외식을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이번달 말까지 하고 퇴사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계약 연장에 관해 물었고, 나는 솔직하게 그간의 일들을 말했다. 사실 정규직 이야기가 있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무기계약직을 하라고 하더라. 나는 싫다고 했다. 매일 마감에 시달리고 매번 새로운 것을 만들어 써야 하는 것도 지쳤고, 내 업무와 창작물에 내 이름은커녕 남에게 그 공이 돌아가는 꼴도 못 보겠다. 일순간 정적. 아차 싶어서 “그래도 퇴직금도 생각보다 많고, 이번에 주식도 받는다. 실업급여도 쏠쏠한 데다가 오라는 곳도 몇 군데 있어서 바로 취직이 될 것 같다.”라고 말을 더했다. 엄마와 언니는 잘 되었다, 퇴직금 털어서 여행도 다녀오고 어디 한 번 마음껏 써보라고 했다. 다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그때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수고했다” 그 말 한마디를 듣는데 눈물이 왈칵 터졌다. 화장실로 급히 뛰쳐나갔다. 그 말 하나가 왜 이렇게 슬프던지. 아버지는 나보다 더 거친 야생에서 등에 처자식을 업고 끝이 보이지 않는 그곳을 나아가고 있는 분이다. 나는 고작 4년 휘저어 다닌 주제에 푸념이나 해댄 게 부끄럽고 미안했다.
사회에 뛰어들었을 때, 아버지는 살아남는 방법을 쥐여주셨다. 최저시급에 가까운 월급을 받으며 혹시 돈이 부족할까 봐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친구랑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별의별 명목을 들며 5만 원, 10만 원씩 용돈을 주셨다. 파견직은 명절비와 휴가비가 터무니없이 작다는 걸 들었다며 “이번 휴가는 가족끼리 갈 테니 네가 일정을 짜봐라, 돈은 아빠가 낼게.”라고 하신 덕분에 가고싶던 국내외 여행지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다. 계약기간이 끝날 즈음엔 협력업체와 관련 회사 인사 담당자에게 혹시 일자리 있는지 물어보셨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아마존 밀림을 탐험할 때 원주민들은 마체테를 꼭 들고 다닌다. 길고 무거운 칼인데, 그걸 휘두르면서 길을 헤쳐나가고 자신을 보호한다. 아버지가 나에게 준 건, 사회라는 정글을 잘 나아가라 쥐여주신 마체테였다. 아버지는 그 마체테를 얼마나 갈고 닦아 주신 걸까? 본인의 손에서 피가 날지언정 당신 딸이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길 바라며 날을 갈고 또 갈았을 것이다.
그 덕에 나는 지금까지 숱한 고난과 역경을 잘 베어 나왔다. 지금은 녹이 좀 슬고 날도 많이 무뎌졌지만, 자루가 떨어질 때까지 정글을 헤쳐나가 보려 한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끝>
♥
좋아하는 서른 여덟가지
38세-가 지나기 전에 좋아하는 서른 여덟가지를 써보려고요 :)
이전에 쓴 목록에 없는 것도 있어요. 아직 서른 여덟살을 보내는 중이라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만, 뭐 어때요 내가 좋으면 그만인것을!
※좋아하는 서른 여덟가지 목록
1.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
2.드라마 '인어 아가씨'
3.이어폰
4.열 다섯,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다현
5.아버지가 쥐어주신 마체테
(앞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