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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마음껏 살았습니다.

by 은주리

공부를 제법 잘하는 편이었다.

친구들과도 잘 지냈고 보통의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3 때 늦은 사춘기가 왔고 공부가 아닌 다른 것들이 하고 싶었다. 연영과, 신방과 같은 곳에 원서를 넣었지만 이과였던 나는 문과 내신도 별로고 물수능을 잘 보지도 못해 다 떨어지고 말았다.


예비로 간신히 합격한 학교에 힙합 동아리가 있었고 같은 과 선배들이 있었다. OT 때 친해진 친구들과 그곳에 발을 들였고 나의 춤바람도 시작되었다. 힙합바지를 입고 레게머리를 하고 학교 축제, 지역 행사 등 수많은 공연을 다녔다.

댄스팀에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용돈은 커녕 차비도 없어 입시학원 강사를 시작했다.

춤 아니고 국어 강사.

일을 하면서도 동아리 공연도 같이 하고 수학 강사로 이직하면서 KT&G 수원 상상마당에서 대학생을 상대로 힙합 댄스 수업도 했었다.


애써 붙잡고 있던 춤은 서른 살이 되면서 추억이 되었다.

몸은 굳다 못해 병들어가고 있었다. 아침마다 온몸이 부었고 매일밤 종아리에 쥐가 났다. 미친 듯이 수업하고 술 마시고 늦게 잠들고 점심 때 일어나 출근하는 일상의 연속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러다 죽겠다 싶을 때 찾은 것이 크로스핏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발레와 살사도 배우고 있었지만 모두 정리하고 크로스핏에 정착하고 말았다. 하필.

일찍 일어나 운동을 가고 깨끗하게 먹고 출근하고 퇴근하면 바로 귀가해 일찍 자는(거의 기절에 가까웠지만) 소위 바른 생활 어른이가 되었다.


강사 10년, 크로스핏 5년 차에 기회가 생겼다. 지긋한 입시 학원에서 탈출할 기회.


“크로스핏 테디짐에서 함께 할 코치를 구합니다.”


회원으로 다니던 곳에서 처음으로 공개 구인 공고를 올린 것이다. 바로 자소서와 이력서를 넣었고 학원에는 사직서를 냈다. 초보 코치는 겨드랑이에 휴지를 끼고 수업할 만큼 긴장했지만 즐거웠다. 매일 윽박지르고 1점, 2점에 목매던 입시 전쟁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가르치는 즐거움이었다.


제주도로 이주를 하면서 잠시 학원 강사로 돌아갔지만 크로스핏 레벨 2 자격증을 취들할 만큼 그 자리는 놓을 수가 없었다. 인연이 닿아 다시 코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처음보다 더 즐거웠다. 제주 사람은 상상도 못 할 거리를 하루 두 번씩 오갔다. 퇴근길 차에서 사과, 달걀, 방울토마토 등을 싼 도시락으로 매일 저녁을 때웠다. 그래도 즐거웠다.


24년에는 온라인 크로스핏 PT 프로그램을 구독하며 운동에도 매진했다. 나날이 몸이 좋아지고(특히 팔이 일품이었다. 뿌듯) 못하던 동작도 하나 둘 되어가며 스스로도 실력이 늘었다 느껴졌다. 한해를 마무리할 즈음 대회도 나가보고 싶어 팀을 꾸리고 휴가 때도 운동을 이어갔다.


휴가 마지막 날 미루고 미루던 건강검진을 다녀왔고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실히 했다 자부하는 운동 프로그램을 그만두어야 했다. 제법 크로스핏터 테가 나기 시작한 회원들 곁을 떠나야 했다. 어떤 치료를 할 지는 모르지만 크로스핏을 전처럼 할 수는 없을거라 생각했다.


이제 운동을 쉰 지 두 달이 넘어간다. 얼마 전까지도 수술한 쪽 팔이 너무 당겨 만세도 힘들었다. 재활의학과를 다녀오고 나아졌지만 철봉에 매달리거나 무거운 것을 드는 운동(이 둘을 빼면 크로스핏은 시체나 다름없다.)은 조심하라고 하셨다.


이제 나는 무얼 해야 할까?

무얼 가르치고 무엇을 공유해야 할까?


고민 끝에 지금까지의 생활을 공유하는 것부터 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정리하다 보면 나의 길이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상상하지도 못한 더 재미난 길이 나타나기 않을까?


82년생 김은주는 인생 처음으로 앞날을 고민하며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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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