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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너스 : 죄인들

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by 송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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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3.


개봉했을 때부터 보고 싶었는데 조금 늦게 보게 되었다.


라이언 쿠글러는 내게 ‘블랙팬서’와 ‘크리드’로 친숙한 감독이다. ‘와칸다 포에버’는 주연 배우인 채드윅 보스만의 사망으로 스케줄이 꼬이고 각본을 수정하는 등 문제가 많아 여러모로 아쉬웠지만 쿠글러 감독은 대체로 일정 수준의 영화를 만들 줄 아는 능력 있는 감독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라이언 쿠글러의 영화는 흑인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게 들어있다. ‘블랙팬서’는 물론이거니와 ‘크리드’에서도 그런 면을 엿볼 수 있다. ‘씨너스’에 대해 사전 정보를 하나도 모르고 보았지만(공포 장르인지도 몰랐다) 영화 서두에 흐르는 나레이션과 배경을 보고서 아, 하고 숨을 삼켰다. 1932년 미시시피. 이것으로 영화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지 대충 감이 왔다. 그리고 그것은 내 예상과 조금 궤가 다르게 흘렀다.


간단하게 스토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시카고에서 7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쌍둥이 스모크와 스택은 ‘클럽 주크’를 연다. 기타를 잘 치고 노래를 잘 부르는 조카 새미와 피아노와 하모니카 등 연주꾼 델타 슬램을 퍼포머로 데리고 오고 스모크의 (전?) 아내인 애니는 주방, 덩치가 큰 콘브레드는 입구 가드, 중국인 보와 그의 아내 그레이스는 간판 제작을 맡는다. 클럽을 오픈한 밤, 그들의 흥분된 밤에 이끌려 뱀파이어가 찾아온다. 뱀파이어들은 클럽을 습격하고 인간들은 뱀파이어에게 대항한다. 많은 희생을 치루고 살아남은 새미는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향하고 시대는 흘러 1992년이 된다. 노인이 된 새미를 뱀파이어가 된 메리와 스택이 찾아온다. 죽음을 각오한 새미지만 스택은 새미에게 노래 한 곡을 청한다. 심금을 울리는 진짜 음악을 들려달라고. 새미는 기타 연주와 노래를 스택에게 들려주고 스택과 메리가 클럽을 나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단순하게 흑인만을 시대의 피해자로 내세웠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라이언 쿠글러가 이러한 메시지를 담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소 걱정되었는데—그렇다고 해도 노골적이고 촌스럽게 담지 않는다—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내 부족한 지식과 시선으로 ‘씨너스’는 흑인에 대한 차별 뿐 아니라 모든 이가 겪고 있는 차별을 다룬다.

1930년대 미국 남부. 노예제를 폐지했지만 여전히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며 영화에서도 그것을 굳이 짚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차별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든다. 무얼하기 전에 이미 그어진 선 때문에 선 바깥을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선이 그어진 채로 살아왔다면 선 자체를 한계로 느끼고 당연하게 여긴다. 이것은 새미의 아버지인 목사에게서 강하게 나타난다. 블루스를 하면 안 된다. 춤추고 노래하고 술 마시는 건 사탄이나 하는 짓이다. 왜 목사는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종교만이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일까? 아무리 극악무도한 인종차별자라도 종교까지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건드린 놈들도 있다고 하지만.


다시 돌아와서 흑인이 차별을 받는다고 하지만 반대로 차별하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 스택의 전 연인인 메리는 외할아버지가 흑인 혈통이며 어릴 때부터 흑인과 함께 자라서인지 흑인 말투로 말한다. 백인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새미는 메리를 보고서 ‘백인이 우리랑 함께 있어도 되냐’고 묻는다. 이건 차별을 받아왔기 때문에 미리 선을 긋는 걸지도 모르지만 새미 쪽에서 먼저 선을 그은 거라고도 볼 수 있다. 메리가 선을 그은 게 아님에도 너와 닮은 인간들이 선을 그었으니까 너도 그럴 거야, 하고 선입견을 갖는 것이다. 겉만 보고서는 알 수 없다.


이건 뱀파이어인 렘믹에게도 해당된다. 렘믹은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아주 못되고 악한 존재라고 받아들이기 쉽다. 실제로도 인간들을 도륙하고 뱀파이어로 만드니 영화적 빌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차별과는 동 떨어져 있다. 뱀파이어 권속이 된 사람들은 기억을 공유한다. 이것은 아픔을 공유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렘믹을 비롯한 뱀파이어들은 ‘우리’라는 말을 쓴다. 영미권에서 ‘we’란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몰라도 영미권에서는 더욱 이상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렘믹은 뱀파이어가 되면 평등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도 말한다. 모두의 기억—아픔을 알고 있으니 차별할 이유가 없다. 차별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본다. 진심을 모르고 겉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면서 핑계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오해한 채로 두고 미워하는 편이 더 간편하다. 렘믹이 새미를 권속으로 만들고 싶은 이유도 그들이 이미 잃은 과거의 가족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새미의 노래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벽을 허무는 힘이 있다. (장르적 특징이 살아나는 순간으로 이것을 영상과 소리로 구현한 게 일품이다. 감독의 상상력에 놀랐다.)


하지만 렘믹이 평등한 세상 만들기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어도 그가 하는 행동은 전혀 좋지 못하다. 대화로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하는 행동이 강제적인 흡혈이면 누가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서로를 설득하는 건 압도적인 힘, 폭력일지도 모르겠다.


‘씨너스’는 영상미와 사운드가 대단하다. 영화 내내 블루스 음악이 계속 깔리는데 나도 모르게 리듬을 타게 된다. 블루스는 마치 우리나라의 ‘판소리’, ‘민요’처럼 한이 담긴 흑인들만이 부를 수 있는 장르로 묘사된다. 개인적으로 뭉클했던 건 슬램이 자신의 친구가 겪었던 인종 차별 사건을 말하면서 낮은 울음 소리를 내는데 그것을 블루스로 이어나가는 지점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한을 노래로 승화하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블루스만큼이나 중요한 게 아일랜드 민요다. ‘이동진의 파이아키아’를 보고 알았는데 렘믹이 부르는 노래가 아일랜드 민요라고 한다. 아일랜드도 오랜 시간동안 식민지 생활을 받았고 같은 백인에게 인종 차별을 당한 아픔이 깊은 나라이다. 즉, 렘믹과 스모크의 싸움은 인간과 뱀파이어의 싸움이 아니라 비인종차별주의자끼리의 싸움인 것이다. 같은 아픔을 가진 존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 싸우는 것이다. 인간인 나로서는 인간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지만 쿠글러 감독이 아주 적절한 은유를 사용했다.

최종전이라 할 수 있는 KKK단과 스모크의 싸움은 오히려 싱겁게 끝났는데 이는 인종 차별 피해자는 낮이고 밤이고 쉴 새 없이 그것을 당한다는 걸 표현한 것처럼 보였다. 스모크가 기관총으로 쓸어버리지만 그처럼 강력한 무기 없이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사회, 그리고 절대 다수의 힘 앞에서 무너진다.


차별과 함께 한 가지 더 영화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게 있다. 바로 ‘선택’이다. 인간은 매순간 선택한다. 슬램은 매주 나가는 클럽 대신 많은 페이와 아일랜드 맥주를 얻기 위해 신장개업하는 ‘클럽 주크’를 고르고, 스택이 유부녀이자 백인인 메리를 지켜야 하지만 메리의 끈질긴 유혹에 굴복해 클럽 밖으로 쫓아내지 않고, 스모크가 뱀파이어가 된 스택이 자신이 알던 스택이 아님을 알지만 죽이지 않고, 새미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기타를 쥔 채 대도시로 나간다. 선택은 현재를 사는, 영생을 살지 못하는 인간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다. 선택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선택에 대한 결과와 결과에 대한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새미는 교회가 아닌 블루스를 선택함으로써 클럽을 가지게 되었고 약 80세가 되어서도 블루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기타를 버렸다면 새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결국 대도시를 나왔을까? 스모크의 말대로 목사가 되어 불투명한 선택을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고 안심했을까? 누구도 알 수 없다. 인간은 현재를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포 영화라고 하지만 그다지 무섭진 않았다. 조금 고어하고 징그러운 장면이 있지만 사람들을 놀래키려고 작정한 영화라기보다는 보는 재미 아래 은은한 메타포와 메시지를 깔아두었기에 해석하는 재미가 있었다. 해석이 감독의 의도와 전혀 다른 엉터리더라도 재밌었다.


만약 볼 거라면 극장에서 큰 스크린에 빵빵한 스피커로 보는 게 낫겠다.


쿠키는 두 개다! 짧은 크레딧이 올라가고 한 번, 모든 크레딧이 올라가고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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