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제션

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by 송건자
‘포제션’ 포스터

2025.10.08.


이 영화를 왜 보게 된 건지 사실 모르겠다. 강렬한 포스터에 끌렸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81년도에 개봉한 작품이었고 최근 재개봉한 영화에 무척이나 끌렸기에 안 볼 이유가 없었다. ‘태풍 클럽’처럼 나와 맞지 않는 영화도 있지만 세월이 지나도 명작 혹은 걸작은 그 이유가 있기에 극장에서 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보면서도 드는 생각은 ‘무슨 영화를 본 거지?’ 라는 의문이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의문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해석하고 싶었는데 내가 가진 지식으로는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의 평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제목의 뜻을 사전에 찾아보고 나서야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다.


possession 소유, 소지, 재산의 소유권, 귀신에게 홀린 상태.


신 들린 이자벨 아자미의 연기를 보면 ‘빙의’가 맞는 것 같지만 그것보다는 자기 자신의 ‘소유’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81년이라는 배경으로 미루어 보면 여성—특히 결혼을 한 여성에 대한 통념적 ‘믿음’은 그들이 되고 싶은—안나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다— 가능성, 즉 ‘자유’를 빼앗았다. 안나는 외도라는 형태로 일시적으로 ‘자유’를 되찾은 것 같지만 ‘바람’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안나가 바란 자유는 보다 본질적일 터. 안나가 잃어버린 ‘자유’의 본질을 찾고 싶어 한다. 그 결과 안나는 촉수와 남성기의 모습을 닮은 괴물을 낳는다. 낳는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지하철역 씬에서 보여준 강렬한 씬에서 안나가 하혈한 하얗고 빨갛고 초록색인 액체는 ‘그것’이 뒤집어 쓴 액체와 비슷해 보인다. 안나의 대사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그것’은 안나 속에서 약해진 ‘믿음’으로 보인다. 남성들은 안나를 찾으러 왔다가 ‘믿음’의 외형을 보는 것만으로 괴성을 지르고 눈이 먼다. 통념적인 ‘믿음’의 덕을 본 그들이 본질을 보지 못하는 건 아이러니하다. 안나를 속박하려 했던 마크만이 ‘그것’에 익숙해지고 안나의 악행을 돕는 건 또 아이러니하다. 마크를 떠나게 만든 ‘그것’이 안전하게 완전해질 수 있도록 돕는다니. ‘그것’을 외간 남자라고 생각하면 아내의 불륜 상대를 도와주는 꼴이다. 안나의 사랑을 되찾으려는 건지 부창부수를 보여주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안나가 만든 ‘그것’은 인간다운 형태로 굳어지는데 탈이 ‘마크’인 건 또 아이러니하다. 자신을 끝까지 집착해준 마크에 대한 안나의 감사일까. 벗어날 수 없는 마크의 속박에 자기도 모르게 ‘믿음’의 형태를 만들어버린 걸까.


안나는 ‘믿음’과 ‘기회’에 대해 계속 말한다. 앞서 말한 해석은 여성에 대한 통념으로 해석했지만 이것은 마크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마크는 분단된 나라—독일을 위해서 전쟁에서 첩보원 임무를 수행한다. 베를린 장벽 건너편에서 감시하는 모습이 보이고 강물에 떠내려가는 죽은 개—마크의 어릴 적 기억에서 중요한 요소로 그의 뿌리라고 보여진다—는 마크를 속박하는 매개체로 보였다. 마크는 아내 안나와 아들 밥과 잘 지내보기 위해 첩보원도 그만두려고 하지만 그의 상관들은 계속해서 마크가 남기를 바란다. 이는 마크에 대한 ‘믿음’, 사회적으로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당신만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없다며 ‘믿음’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크가 진정 하고 싶은, 가족과 잘 지내고 싶은 ‘기회’를 앗아갔고 또 앗아가려고 한다. 이미 마크는 ‘기회’를 놓쳤다. 밥은 학교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아내는 불륜 상태이다. 마크도 전쟁 트라우마 때문인지 어린아이 같은—밥과 비슷한 행동을 보인다. 일부러 밥의 티셔츠를 벗기는 장면 다음에 마크의 티셔츠를 벗기는 장면이 이어진다.(안나의 티셔츠를 벗는 장면도 겹쳐진다.) 밥이 케찹을 입에 잔뜩 묻힌 모습과 마크가 불륜남 하인리히 펀치에 코피를 쏟아 입이 다 빨갛게 되는 모습도 둘의 연관성을 보여주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기회’를 여러 번 박탈당한 마크는 안나를 가족 품으로 되돌리고 싶은 ‘기회’를 얻고 싶다. 그래서 안나를 폭력적으로 대하고 하인리히를 불쑥 찾아가고 탐정을 고용해 미행을 지시한다. 하지만 안나가 불륜남 하인리히와 잘 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자신과 아내를 동일시하고 안나를 돕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본 하인리히를 처리하고 안나의 살인을 방화로 무마시키는 역할을 마크가 스스로 나서기 때문이다.


종국에는 자신을 닮은 ‘그것’과 찾아온 안나와 재회하는 마크지만 그들을 쫓아온 경찰에 의해 사살 당한다. ‘그것’은 우연히 만난 여성을 이용하여 수라장을 빠져 나가 밥을 찾아간다. 밥은 문을 절대 열어주면 안 된다며 선생님 ‘헬렌’에게 외치며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물에 빠진 개처럼 둥둥 떠있다. 뭐든 될 수 있는 ‘기회’가 죽은 것처럼.


안나—여성 속박과 소유에 대한 감상을 보니 마크—남성 속박과 소유에 대한 감상으로 뻗어나갔다. 흔히 맨박스라고 부르는 남성 역할에 대한 사회의 기대치와 시선이 그가 되고 싶은 가능성을 죽인다. 사회는 남성과 여성, 인간 모두를 ‘믿음’이란 허울로 ‘소유’하려고 하며 뭐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인간은 제정신이 아닌, 귀신에 홀린 상태가 된다.


사실 영화를 보면 이런 해석이 나오는 게 신기하다. 영화가 상당히 불친절하기 때문에 나같은 라이트 영화 관객은 관람과 해석에 상당히 애를 먹는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기를 잘했다. 있어 보이려는 욕구도 쌓이면 내 것이 되며 꿈보다 해몽인 해석도 감상의 폭을 넓히기 때문이다.


잔인하고 무섭다는 평이 있어서 잔뜩 겁을 먹었는데 그다지 무섭지 않다. 피칠갑인 장면이 더러 있어 고어한 장면을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는 곤욕일 수 있겠다. 하지만 점프 스퀘어가 많이 나오는, 관객을 놀래키려는 공포 영화는 아니라 공포 장르를 이용한 예술 영화로 느껴졌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안나/헬렌 역을 맡은 이자벨 아자미가 정말 정말 정말 예쁘다. 최근 배우로는 마가릿 퀄리—서브스턴스에서 수 역할을 맡은—와 이미지가 비슷한데 훨씬 예쁘게 보였다. 영화가 덜 공포스러웠던 이유가 이자벨 아자미 때문일지도? 단순히 미모만 칭찬하면 안되겠다. 혼자서 미친 연기, 특히 지하철 씬은 촬영이 너무 고되었을 것이다. 그 장면 때문에 영화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찍을 때는 힘들었어도 완성된 장면을 보고서는 뿌듯하지 않았을까 감히 예상해본다.


박찬욱 감독이 ‘박쥐’ 찍기 전에 김옥빈 배우에게 ‘포제션’을 보라고 했다던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따라하려면 고전을 따라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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