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2025.10.31.
다음주면 넷플릭스에서 공개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의 원작을 기반으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재해석이 들어간 작품이다. 영화를 아름다운 우화처럼 만드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감독이기에 넷플릭스에서 공개 예정임에도 극장을 찾았다. 러닝 타임은 2시간 30분으로 꽤나 길다.
영화는 소설 원작을 따라가지 않는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이 ‘그것’—‘괴물’을 창조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원작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나오지 않거나 인물간의 관계가 달라지는 등 원작과 다르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남았던 것만 쓰고자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은 우화적인 느낌이 강하다. ‘판의 미로’부터 그러한 느낌을 받았지만 ‘셰이프 오브 워터’부터 그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나이트메어 앨리’는 그것의 정점이라고 느꼈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플롯 또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을 암시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못 본 사람이 있다면 꼭 보길 바랄 정도로 재밌고 흥미롭다.
이번 영화도 그러하다. 제목은 ‘프랑켄슈타인’이지만 내 나름대로 이름을 붙이자면 ‘shape of human : 순수의 형태’라고 고쳐 달고 싶다.
본작은 인간의 순수함에 대해 다룬다. ‘순수’라는 단어는 깨끗하고 무결해서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만 붙일 수 있는 단어처럼 보이지만 순수악, 이란 단어가 있듯 순수는 마냥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순수하다. 어머니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순수한 증오, 그것이 복합적으로 얽혀 형성된 빅터의 왜곡된 성정은 인간이—자신이 신과 대등할 수 있다고 믿는다. 태어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죽는 건 선택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보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그 결과 ‘그것’—‘괴물’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빅터는 어머니를 잃는다. 동생 윌리엄을 출산하다가 목숨을 잃는데 그 순간부터 빅터는 성장이 멈췄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을 누구보다 거부하고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아버지를 증오한다. 빅터는 순수한 어린아이인 채로 자라나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빅터가 만든 ‘괴물’은 순수하다. 이번에 사용한 ‘순수’는 긍정적인 의미다. ‘괴물’은 범죄자와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의 살갗과 뼈를 기워 만든, 어쩌면 부의 덩어리를 붙여 만든 존재지만 정신만은 순수하다. 세상에 태어난 아기처럼 행동도 어설프고 말도 못한다. 새끼 오리처럼 빅터가 처음 일러준 자신의 이름, ‘빅터’만 반복한다. 빅터는 아이를 가져본 적 없고 그의 아버지가 폭력적인 훈육으로 키웠기 때문에 ‘괴물’에게도 똑같이 대한다. 빅터의 아버지가 회초리로 아들의 얼굴을 때렸다면 빅터는 그의 아들—‘괴물’을 쇠꼬챙이로 후려 갈긴다. 아이를 키우려면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지만 열 달을 품지 않은 자식에게 그러한 애정이 있을리 없다. 성과를 내기 위해 살갗을 기운 괴물에게 어떤 감정이 있겠냐는 말이다. 괴물은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한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악의를 가지고 빅터에게 고통을 준다. 빅터가 자신의 창조자일진 몰라도 나는 너의 주인이 되겠다, 며 빅터가 죽지 않을 만큼 괴롭힌다. 그런 괴물을 이해하는 존재가 둘 있으니, 바로 빅터의 동생 윌리엄의 부인인 엘리자베스와 숲속 목장에 사는 장님 할아버지다.
엘리자베스는 순수하다. 빅터가 자신의 열망을 잊을 만큼 아름답고 순수해서 그를 탐하려고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빅터를 거절한다. 윌리엄이 아니었다면 대꾸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님 할아버지는 괴물의 스승이다. 말을 가르쳐주고 괴물에게 꿈을 가르친다. 두 사람 모두 ‘괴물’을 끔찍한 외형이 아닌 순수한 내면을 보았고 괴물의 눈앞에서 죽는다는 점과 괴물의 변화를 촉구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겠다.
마지막에서 빅터가 괴물에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빅터는 그가 저지른 두 번의 살인—하인리히와 엘리자베스—을 괴물에게 미룬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탓을 다른 데에서 찾는다. 하지만 그가 정복하고자 했던 죽음 앞에서 솔직해진다. 괴물에게 용서를 구한다. 죽음을 극복한 존재, 그가 빚은 아들, 신의 육체를 가진 존재에게 말이다. 빅터의 아버지가 하지 않았던 잘못을 인정하고 아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것은 빅터의 참회이며 빅터가 죽음을 앞두고서야 한 인간으로 성장했다는 걸로 보였다. 용서하겠다고 말한 괴물 또한 빅터를 용서함으로서 그가 되고 싶은, 죽고 싶은 존재, 인간이 된다. 실제로는 죽지 못하지만 스스로를 괴물이라 보지 않고 하나의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다.
빅터와 괴물은 거울을 마주보는 존재처럼 똑 닮았다. 죽음을 극복하고 싶어 하는 것과 죽고 싶어하는 것의 차이를 빼면. 둘의 관계는 빅터와 빅터의 아버지의 관계와도 같다. 빅터는 빅터의 아버지에게 엄하게 다뤄져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었고, 괴물은 빅터에게 엄하게 다뤄져 빅터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두 사람이 마지막에 대화하고 용서하지 않았더라면 둘은 영원히 넘을 수 없는 죽음의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원망하고 용서하고 용서받지 못할 뻔했다. 만약 그렇게 끝이 났다면 영화는 무척 씁쓸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예르모 감독이 그렇게 둘 리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순수’와 ‘인간이 되기 위해 가져야 할 마음’을 다룬다.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마음이 괴물이라면 그것은 인간인가? 괴물인가? 영화는 있는 그대로의 나, 그것의 한계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빅터가 용서를 구하는 장면과 일출을 바라보며 괴물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나는 그렇게 느꼈다. 둘 다 변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인간으로 끝맺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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