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

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by 송건자
‘세계의 주인’ 포스터


2025.11.5.


‘우리들’, ‘우리집’으로 익숙한 윤가은 감독의 신작이다. 처음에는 윤가은 감독의 작품인지 몰랐다. 이전작들이 어린아이들의 시점으로 극을 이끌어 갔기 때문에 이후 작품도 비슷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를 붙인 3부작이 나올 거라는 어설픈 예상 탓도 있다. 사실 볼 예정은 없었지만 윤가은 감독 작품이라기에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개봉주가 아니면 상영 시간이 줄 것 같아서 서둘러서 보았다.


영화는 ‘이주인’이라는 고등학생 소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평범한 학교 생활과 단란한 가족을 보여주는듯하다가 조금씩 어긋난다.


처음에는 전체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 가족, 연애, 우정 등 소녀의 평범한 일상이 흩뿌려져 있다. 관객은 주인의 일상에 조금씩 물들여 간다. 관장조차 없는 빈 태권도장에서 발차기 연습을 하고 봉사 활동을 하고 답이 오지 않는 메시지를 아빠에게 보내고 엄마를 도와 유치원에서 애들을 돌본다. 세세한 부분은 다르겠지만 지극히 평범한 소녀가 겪는 일상이다.

하지만 주인이 겪은 과거가 드러났을 때, 그것을 억지로 참아왔다는 걸 알았을 때 주인의 과장된 행동이 트라우마를 잊기 위한 방어기재였구나, 생각했다. 찬우와 농밀한 키스를 나누고(극에서 두 번이나 꽤나 길게 나온다) 첫경험을 시도하려고 할 때 찬우를 밀어내는 모습을 보고 주인은 아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그건 찬우가 서툴러서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주인의 탓도 아니다. 주인이 ‘천천히’라고 말하는 건 지금 하려는 일이 자신의 주도하에 있고 안심하기 위해서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하는 행위이다 보니 한 사람에게 온전히 템포를 맡기기란 어렵다. 그런 면에서 찬우가 주인을 아끼는, 참 좋은 남자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찬우의 친구들이 주인을 험담했을 때 발끈하며 두둔한 것도 그렇고 주인이 거부했을 때 힘으로 제압하지 않고 순순히 사과하는 모습은 어수룩한 소년이 아니라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라는 게 느껴졌다. 만약 찬우가 강제로 주인을 범하려고 했다면 주인이 어렵게 쌓아올린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영화 장르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주인’을 연기한 서수빈 배우를 처음 보았을 때 붕 떠있는 느낌을 받았다. 연기가 어색한 건 아닌데 주위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쓴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주인이 과거 겪은 성폭력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상처는 피가 멎고 새 살이 돋아도 흉이 진다. 그 흉터를 가리기 위해, 흉터를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다. 과거에 남들이 보기에 일어나서도 겪어서도 안 되는 일을 겪었다고 해서 그들의 인생이 망가지는 건 아니다. 주인의 말마따나 고작 인간 같지 않은 인간에게 당한 일 때문에 탄탄대로로 빠질 주인의 인생이 망가져선 안 된다. 수지 맞는 장사가 아니다.

잔혹하게도 시간은 흐르고 삶은 이어진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도 죽지 않는 이상 삶은 이어진다. 그게 삶이다. 이는 주인뿐이 아니다. 미도도, 엄마도, 동생 해인도, 내가 짚지 않은 등장인물들 모두가 상처를 가지고 있다. 누리를 과보호하는 수호도 그렇다. 수호의 과거는 나오지 않는다. 편부 가정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동생 누리를 과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순히 편부 가정이기 때문에 수호가 과보호하는 게 아닐 수 있다. 초점이 주인에게 맞춰져 있어서 모를 수 있지만 수호 역시 남들이 알 수 없는 아픔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리를 과보호하고 성폭력 범죄자가 돌아오지 못하도록 서명을 받는 것이다. 주인이 수호에게 생기부 잘 받으려고 서명 받으려는 거 아니냐? 고 묻는 장면에서 수호도 발끈한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 아니라 수호 역시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아픔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는 성폭력 피해자를 다루지만, 꼭 그것에만 국한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멋대로 해석하자면, 영화는 배려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진실’을 꼭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실은 고귀한 가치를 가졌고 누구나 알아야 하고 알아도 괜찮은 절대선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은 무척이나 잔인하고 적나라하다. 진실을 마주했을 때 똑바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주인이 성폭력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친구들은 예전처럼 주인을 대하지 못한다. 제멋대로 주인의 행동을 추측한다. 트라우마 때문에 성에 집착하는 거라고 트라우마를 감추기 위해서 더 오바하는 거라고. 나아가서는 진실을 믿지 않는다. 거짓말을 자주하고 기분의 온도차가 심한 주인이니 일부러 거짓말 하는 게 아니냐고. 그 장면을 보면서 어쩌라는 건지 짜증이 났다. 이건 내 주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오히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주인을 있는 그대로 봐준다. 미도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마냥 어린애인 줄 알았던 동생 해인도 그렇다. 해인이 침대 밑에서 삼촌—주인을 범한 가해자—이 보낸 편지를 발견했을 땐 울컥했다. 한 통도 아니고 십수 개에 달하는 편지 봉투가 떨어졌을 때, 그리고 삼촌에게 다시는 편지를 보내지 말라는 삐뚤삐뚤 적은 해인의 편지를 보고서 다른 게 어른이 아니구나 싶었다. 배려는 받는 사람이 알 수 없어야 진정한 배려다. 그리고 그 배려가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지킨다.


하나 더 말하자면, 우리는 ‘괜찮다’는 말을 너무 자주한다. 문제가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괜찮냐는 말에 기계적으로 ‘괜찮다’고 말한다. 아무렇지 않다고, 아프지 않다고. 주인이 수호의 동생 누리에게 아프지 않냐며 깁스한 팔을 누르고 반창고를 댄 부분을 누르는 걸 처음 봤을 땐 누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수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팠을 때 아프다고, 하지 말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엄마처럼 병을 키우지 않아야 한다. 주인처럼 당하지 않아야 한다. 누리처럼 아픈 걸 참지 않아야 한다. 아픈 건 죄가 아니다.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고통에 무덤덤해지면 안 된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하고 울 수 있을 때 울어야 한다.


곱씹을수록 짚고 싶은 부분도 많고 다시 생각하게 되는 부분도 많다. 단짝 친구 유라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말을 아낀 건 지금껏 속인 배신감이 아니라 절친 주인이 겪었을 아픔을 알지 못한 사실과 자신이 그려온 19금 만화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배려가 부족했던 스스로에게 실망해서 그런 게 아닐까? 쓰고 싶은 말이 많은데 여기까지만 하려고 한다. 극장에서 보길 참 잘했다.


영제로는 The world of Love인데, 왜 ‘사랑의 세계’일까 궁금했다. 본의 아니게 영자막이 함께 나오는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영화 말미에 주인은 장래희망을 ‘사랑’이라고 적는다. 그 밑에 이유가 써있는데 빨리 지나가서 읽지 못한 게 아쉽다. 나중에 다시 보게 된다면 뭐라고 썼는지 궁금하다. 여하튼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면 아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려 가득한 세상에서 모두가 웃는 얼굴로 지내지 않을까 상상했다. 그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룰 수 있는 꿈이다. 윤가은 감독 작품답다.


#윤가은 #세계의주인 #영화 #영화감상 #기록 #2025년

keyword
작가의 이전글프랑켄슈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