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2026.2.3.
2025년 제78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심사위원상 수상작.
시놉시스를 봤을 땐 ‘테이큰’ 같은 장르인 줄 알았다. ‘테이큰’은 딸을 찾는 전직 특수 요원이라면 ‘시라트’는 일반 소시민의 관점에서 5개월 동안 연락이 두절된 딸을 찾는 절절한 이야기라고. 이게 왠걸. 시놉시스에서 예상한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시라트’는 영화가 시작할 때 무슨 뜻인지 바로 알려준다. 천국과 지옥을 잇는 다리로, 그 다리는 무척 가늘고 날카롭다고 한다. 영화 서두에서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담긴 제목의 뜻을 관객에게 공유하는 건 영화가 쉽지 않을 거라고 전선포고를 한 셈이다.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에 알려줄 수 있는 걸 처음에 알려주었으니 말이다.
레이브 파티를 몰라서 사막 한가운데서 대형 스피커를 산처럼 쌓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신나 보인다! 라는 생각보다는 뭐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록 페스티벌을 보면 처음 듣는 노래라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재밌고 즐거운 감정이 전해지데 영화에서 나온 레이브 파티는 재밌다기보다는 기괴했다. 그들 나름대로 음악에 몸을 맡겨서 춤을 추는데 춤이라기보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전문적인 댄서가 추는 춤과 비교하면 안 되지만 매체에서 접할 수 있는 춤은 정제된 기술에 가까우니 거부감 비스무리한 감정이 생겼다. 춤을 추는 사람들이 싫다기보다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는 꺼림칙함. 거기에 사막 한가운데서 땀에 쩐 채 모래 바람을 맞아가며 추는 춤을 보니 더 그렇게 느꼈다. 그 무리를 뚫고 아들과 함께 5개월 동안 연락이 두절된 딸을 찾는 루이스. 그러다가 루이스는 한 무리에게서 레이브 파티가 이곳 말고 다른 사막에서도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쫓아가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실 이들을 쫓아가게 되는 계기가 갑작스럽다. 갑자기 전쟁(비슷한 위험한 상황)이 났다며 EU 시민권자를 태우기 위해 군대가 레이브 파티를 멈추면서다. 나라 설정이 모로코로 되어 있는데 모로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전쟁 위험이 있는 나라인가 보다. 여하튼 루이스와 에스테반 부자는 남부 사막으로 가는 사람들을 쫓아간다.
남부 사막으로 가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일을 겪는다. 전쟁 발발 상황 때문에 웃돈을 주고 기름을 사야 하는 상황에서 루이스가 무리의 부족한 돈을 채워주거나 루이스의 차가 일반 자동차라서 큰 돌이 많은 곳은 못 가니까 앞범퍼를 부숴서 갈 수 있게 한다거나 강을 건너지 못하는데 무리의 트럭이 끌고 해쳐나가거나 헛바퀴질하는 트럭의 바퀴를 들고 뒤에서 밀어 빠져나오는 등 우정을 돈독하게 쌓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에스테반이 죽는 사고가 생긴다. 트럭 바퀴를 빼기 위해서 루이스가 한눈 판 사이 루이스의 차가 뒤로 굴러 절벽 밑으로 떨어진다. 에스테반과 개 피파가 타고 있었다. 루이스는 자기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길이 위험해서 차에 타라고 했는데 그 차가 굴러 떨어졌으니. 토닝이 뭉개진 차와 에스테반의 시신을 보았다고 하는 걸 보니 이건 꿈이 아니다. 루이스는 아들을 잃고 무리와 함께 남부 레이브 파티로 향한다. 힘들어하는 루이스를 위해 무리가 자기들만의 레이브 파티를 연다. 레이브 파티에서 버리고 간 스피커에 노래를 틀고 몸부림을 춘다. 몸에 좋은 풀을 먹은 터라 몽롱한 기분에서 다같이 슬픔을 잃어버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지뢰가 터진다. 지뢰를 밟아 죽은 제이드. 그를 향해 달려 가다 지뢰를 밟아 폭사한 토닝. 비기, 스테프, 조쉬, 루이스는 이곳이 지뢰밭이라는 걸 깨닫고 바위까지 가자고 한다. 하지만 발을 뗄 수 없다. 어떻게 지뢰를 밟지 않고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을까? 그들은 지뢰밭을 인식하자 움직일 수 없다. 두 대의 트럭을 미끼로 안전한 길을 찾고자 하지만 두 대 모두 지뢰를 밟고 폭발한다. 망연자실한 비기, 스테프, 조쉬. 루이스는 멍하니 서있다가 뚜벅뚜벅 지뢰밭을 뚫고 바위로 올라간다. 무사히 움직인 루이스. 그를 따라 비기가 어려운 발걸음을 떼지만 지뢰를 밟는다. 조쉬는 루이스에게 어떻게 갔냐고 묻고 루이스는 생각없이 그냥 왔다고 한다. 그렇게 죽을 각오로 눈을 감고 걷는 스테프와 조쉬. 세 사람과 무리가 키우던 개는 무사히 지뢰밭을 떠난다. 그리고 두 량짜리 기차 위에 올라타 어디론가 떠나는 세 사람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초반부를 보면서 딸을 못 찾더라고 마음의 위안은 얻는, 루이스 나름의 결말을 짓는 영화가 될 줄 알았다. 딸을 찾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끝난다면 작위적일 거란 느낌이 들었다. 장르 영화가 아닌 경우 말도 안 되는 결말로 이어져 관객에게 쾌감을 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주는 경우가 잦다. 겉으로 보면 개차반처럼 보이는 무리(제이드, 토닝, 스테프, 비기, 조쉬)가 사실은 각자 나름의 아픔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잊기 위해 열악한 사막을 관통하면서까지 레이브 파티를 다니는 것으로 보였다. 토닝와 비기의 경우는 각각 왼다리와 오른손이 없다. 토닝이 에스테반에게 해준 1인극을 보면 군대에 있을 때 다리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비기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기에 중간중간 보이는 군인들의 모습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스스로 주체적인 생각은 못하고 명령대로 움직이는 존재들. 권력을 위해 갓 성인이 된 아이까지 군대로 끌고 간 것처럼 보이는 묘사는 군대를 억압의 존재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어지는 것이 전쟁과 지뢰이다. 라디오에서 전쟁 소식을 알리자 토닝(기억에 의지해서 다른 인물일 수도 있다)이 꺼버린다. 결국 그를 죽음으로 데려간 것이 군대=지뢰이다. 그러고 보면 군대에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 제이드와 토닝이 첫 번째, 두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면 비기는 군인 생활을 하다가 손을 잃은 게 아니라 전쟁 때문에 손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내 추측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이 희생자 세 명을 그렇게 배치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물들이 죽음을 인식한 순간 죽었다. 루이스가 지뢰를 밟지 않은 건 죽음을 의식하고 있지 않아서다. 만약 지뢰밭인 줄 알았다면 무리가 그곳에서 미니 레이브 파티를 열었을까? 그들에게는 지금까지 수백 수천 시간을 달려온 사막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인식한 순간 토닝과 비기가 죽었다. 스테프와 조쉬는 루이스의 조언대로 아무 생각 없이—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니 산 것이다. 살면서 매분 매초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 불치병에 걸렸거나 의사에게 마음의 준비를 듣지 않는 이상. 노인이라도 멀쩡하게 걸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잠잔다면 당장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다. 에스테반이 핸드 브레이크를 걸지 않아서 죽을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영화 속 인물은 물론 관객들도. 제이드와 토닝도 마찬가지. 지뢰가 터졌을 때 몸에 좋은 풀을 마셔서 환각을 보는 줄 알았다. 제이드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터져 버려!’였기 때문이다. 볼룸을 키워달라며 소리쳤는데 그게 마지막 말이 될 줄은 몰랐다.
‘시라트’라는 뜻을 곱씹으며 영화를 다시 생각했을 때, ‘시라트’는 천국과 지옥을 잇는 다리가 아니라 삶 그 자체를 말한 게 아닐까 싶다. 지금 당장의 상황은 루이스에게 지옥으로 가는 길처럼 보인다. 오히려 실종된 딸의 전단지를 뿌리며 소음으로만 들리는 레이브 파티를 쫓아다니는 게 아들을 잃고 동료를 잃고 지뢰에 터질 뻔한 일보다 훨씬 천국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때는 에스테반과 피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에겐 아무것도 없다. 차도 없어졌고 물자도 하나도 없다. 밝은색 청난방이 점점 땀에 젖어 짙어지는 게 무리와 동화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무리는 시라트에 있는 사람들이다. 무리는 무언가를 이미 잃었고 채울 수 없는 부재를 음악으로 채우려 몸부림치는 존재를 말한다. 루이스가 만난 부랑자 친구들이다. 그들의 과거를 전혀 알 수 없기에 전부 내 추측이지만 그들은 루이스가 겪었던 것처럼 소중한 것들을 잃은 경험이 있다. 그게 신체의 일부든 인간 관계든 마음의 일부분이든. 우리는 당장 죽을 수 없기에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한다. 밥을 먹고 똥도 싸고 잠도 잔다. 자살을 행하는 사람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죽지 못해라도 산다. 그 마음 상태가 ‘시라트’인 것이다.
삶이 ‘시라트’라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언제든 저편으로 갈 수 있으니 서있는 것조차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렇기에 당장 살아 숨쉬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삶을 무한 긍정하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각자의 고민과 걱정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푸념을 막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가끔은 멀쩡한 두 다리로 숨을 쉬고 몸부림 출 수 있음에 감사하는 건 어떨까.
우리는 ‘시라트’ 위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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