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탈 밸류

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by 송건자
‘샌티멘탈 밸류’ 포스터


2026.2.24.


사실 볼 생각은 없었다. 아카데미 후보작이라는 걸 알고 봐야지, 봐야지 나태에 젖어 있었는데 이동진 평론가의 평이 매우 좋은 걸 보고 충동적으로 보았다. 남의 이야기를 듣고 보다니 줏대가 없다고 자책했는데 다행히 영화가 좋았다. 역시나 상영 시간이 없어서 있는 대로 봐야 했다.


사전 정보 없이 보니 조금 당황했다. 해당 영화에서 쓰이는 주된 언어가 영어가 아니었다. 이건 나의 편견인데 외국 영화라고 하면 대체로 미국 영화, 영국 영화가 많으니까 으레 영어가 나올 줄 알았다. 극의 배경이 노르웨이인 걸로 미뤄서 노르웨이어가 아닌가 싶은데 정확하진 않다. 여하튼 중요한 건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고 탁월한 언어 선택이었다.


줄거리를 압축하자면 어긋나기만 하던 부녀가 서로를 마주볼 수 있게 되는 이야기라고 압축할 수 있겠다. 영화 중반까지는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감을 잡지 못했다. 서두를 노라의 꿈으로 열더니 성인이 된 노라가 연극에 서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극이 중단될 사고까지 이어질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연극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영화가 노라 중심으로 진행되겠구나 싶더니 엄마의 죽음과 함께 이혼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러고는 시점이 아버지 구스타브로 바뀐다. 이야기는 이처럼 한 명의 시점을 진득하게 따라가지 않고 노라, 구스타브를 오간다. 중간 다리로 노라의 동생이자 구스타브의 둘째딸인 아그네스가 극을 이끈다. 관객은 세 사람의 일상, 대화와 감정 상태를 미루어 짐작해야 한다. 소설 작법에서 말하는 ‘보여주기’라고나 할까? 중후반까지는 빈 컵에 물을 붓는 것처럼 계속 인물들의 모호한 감정을 받아들이기만 한다. 내가 느끼기엔 손주 에리크를 구스타브의 영화에 출연시키냐 마냐로 다투는 아그네스와 구스타브의 대화를 기점으로 인물들의 감정 상태와 역사가 이해되고 세 사람이 겪은 일들이 해일처럼 밀려든다.


노라는 정신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정확한 대사가 기억나지 않지만 연극 무대에 나서면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배역에 맞춰 가둬야 해서 오히려 답답하다고 말한다. 이 대사를 보고 노라는 연극 배우를 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자기가 하고 싶어서 배우가 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노라의 과거가 밝혀지면서 노라의 불안을 이해했다.


노라는 자살 미수 경력이 있다. 이유를 짐작했을 때 부모님의 이혼이 결정적이었다. 엄마는 엄마이자 심리상담가답게 두 딸을 보살폈지만 자신이 아플 땐 아이들을 도울 수 없었다. 그 직격탄을 노라가 받았다. 둘째인 아그네스는 엄마가 아프면 언니가 돌봐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노라와 아그네스의 성장에서 차이가 났다. 노라는 자신이 일반적인 가정을 꾸릴 수 없다는 것—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것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럴 것이 연애를 해도 멀쩡한 남자가 아니라 불륜을 하고 있었다. 불륜남이 이혼을 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다가가니 불륜남은 한 발 물러난다. 노라는 자신의 삶과 연애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고민에 빠진다.


내가 보기엔 노라는 돌봄을 받아야 하는 나이에 돌봄을 받지 못했다. 내가 돌봄이라고 굳이 표현하는 이유는 관심과 사랑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노라가 배우가 된 이유는 관심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아그네스는 어릴 적 구스타브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노라는 그렇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주목과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이 배우이며 나아가 영화 감독인 아버지의 관심을 받을 수 있기에 배우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관심으로 노라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 사랑이라 표현하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다. 내게 사랑은 가족 간의 사랑보다는 연인 간의 감정 교류에 가깝다. 그에 비해 돌봄은 관심보다는 부드러우면서 사랑보다는 따뜻하다. 노라는 돌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구스타브가 쓴 영화 대본에서 느낀다.


구스타브의 이야기로 살짝 넘어가보자면, 구스타브는 늙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예술가처럼 느껴졌다. 극 중 여배우 레이첼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여전히 열정 넘치는 예술가처럼 행동한다. 그가 늙고 싶어서 늙은 건 아니지만 자신의 처지를 모른다. 특히 자신과 합을 맞췄던 촬영 감독을 섭외하러 갔을 때 그가 목발을 짚고 어기적 걷는 모습에 없는 변명까지 지어내며 그를 밀어낸다. 예술에 갇혀서 배우는 관심을 먹고 사는 존재라서 같이 살기 어렵다는 둥—자기 딸이 배우인 걸 뻔히 알면서 뻔뻔하다— 예술가는 좀 더 자유로워야 한다는 둥 현실을 망각한 헛소리를 하는데 꽃밭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물론 구스타브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그도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노라가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를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로 구스타브는 어머니의 자살로 어머니를 상실한다. 구스타브와 노라는 다르지만 비슷한 상실을 안고 있었다.


구스타브와 노라는 가장 비슷하면서 대척점에 있다. 구스타브가 두 딸의 곁에 없었으면서 노라를 옆에서 본 것 같이 몇몇 장면을 썼다고 하니 두 사람은 부녀 이전에 인간으로서 동류인 것이다.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고 표현에 능숙하지 못하다.


개인적으론 아그네스의 역할이 컸다. 내가 아그네스였다면 아무리 노라가 어릴 때 잘 대해줬다고 해도 보모 수준으로 챙기진 못할 것이다. 아그네스는 자신이 받은 돌봄을 노라에게 돌려준다고 생각할 테지만—혹은 감독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 받았을 테지만 실제로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아그네스가 아니었다면 노라가 구스타브의 각본을 읽지 않았을 테고 두 사람이 미움을 내려놓고 마주 보지 않았을 것이다. 성모 마리아로 역할을 고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내가 너무 빡빡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이 참 좋았다. 구스타브는 옛 것, 옛 예술이 좋다며 그들이 살았던 집에서 촬영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세트를 지어서 촬영했다. 아그네스도 마음을 고치고 에리크의 출연을 허락했다. 주연 배우 역시 레이첼에서 노라로 바뀌었다. 촬영 감독도 몸이 불편하지만 동고동락한 사람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했다. 블루스크린도 왠지 모르게 좋았다. 극은 극일 뿐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만 서로를 마주보고 돌봄으로서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심과 사랑이 아닌 돌봄, 따스함이 필요하다.


+ 편집이나 영상 부분에서도 뭔가 쓰고 싶은데 잘 알지 못하니 이런 걸 느꼈다는 것만 적고자 한다.


#요아킴트리에 #센티멘탈밸류 #영화 #영화감상 #기록 #2026년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시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