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2026.2.26.
아카데미 시즌에 선개봉하는 기획에 맞춰 보려고 했지만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본 개봉하는 주에 보게 되었다. 누가 감독인지도 모르고 보다니 참 나도 후보작을 좋아한다.
시놉시스도 보지 않았기에 ‘햄렛’을 재구성한 작품인 줄 알았다. 고전은 원류이기에 다양한 시대에 수많은 감독이 자기 입맛대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한다. 얼마 전 개봉한 ‘폭풍의 언덕’이 그러하고 수많은 리메이크작들이 그렇다. ‘햄넷’은 ‘햄렛’과 같다는 서두를 시작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예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영화는 ‘햄렛’의 재구성이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햄렛’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처음에는 아녜스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져서 재구성의 일면인 줄 알았으나 아녜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아내였다. 이 영화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관한 영화인 줄 몰랐다면 영화의 1/3이 지날 때쯤 나오는 힌트로 눈치를 챌 수 있다. 아녜스가 약혼을 허락 맡을 때 ‘윌’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딱 한 번이다. 그제야 나는 이 영화가 셰익스피어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나온 세 아이 중 남자 아이를 ‘햄넷’이라고 부를 때 이 영화를 구성하는 큰 줄기를 비로소 만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계속 생각했다. 영화는 딱히 무언가를 콕 짚어서 말하려들지 않는다. 스펙타클하지도 않다. 블록버스터처럼 펑펑 터지지도 않고 스토리도 롤로코스터를 타지 않는다. 정적인 장면이 많고 감정씬이 많아서 피곤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클로이 자오의 영화니 관객에게 메시지를 곧장 던지지 않고 스크린과 사운드를 받아들이고 각자 해석하는 게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열병으로 햄넷이 죽은 다음에는 보기가 거북할 정도로 감정이 휘몰아친다. 특히 아녜스의 절규는 듣고 보기 힘들었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냐만 그만큼 강렬하다 못해 무섭고 괴롭다. 아녜스는 남편인 윌에게 책임을 묻는다. 아녜스가 윌의 꿈을 지지하기 위해 런던에 보내지만 아들이 죽을 때 곁에 있지 않은 것을 원망한다. 남편을 믿은 대가가 아들의 상실과 아들을 혼자 보낸 슬픔이라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햄넷의 죽음 이후 몇 달 동안 윌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는다. 아녜스가 싫어하는 의붓어머니한테서 셰익스피어의 신작이 오른다는 소식을 듣고 아녜스는 동생과 함께 초연을 보러 간다. ‘햄렛의 비극’. 아녜스는 처음에 연극에 몰입하지 못하고 배우에게 ‘햄렛’을 입에 올리지 말라고 소리칠 만큼 현실과 연극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연극에 몰입한다. 그리고 남편이 ‘햄렛’을 쓴 이유를 알게 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예술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윌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극으로 승화시켰다. 이건 연인과의 이별을 소재로 대중가요를 만드는 것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물론 개인의 경험을 창작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맥이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의 죽음은 이별과는 결이 다르다. 더 깊고 더 진하고 더 아프다.
윌은 왜 ‘햄렛’을 창작했을까? 윌은 ‘햄렛의 비극’을 쓰면서 ‘햄넷’을 애도하며 이야기 속에서 영원히 살게 했다. 아들의 꿈인 배우를 죽어서도 이뤄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는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니 비록 ‘햄넷’은 오래 살지 못했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햄렛’은 아들을 애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대사를 보면 윌의 고통도 녹아 있다. 죽음은 언제나 곁에 있으며 그것이 우리를 덮쳐도 산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가슴에 새긴다. 멀쩡히 살아간대로 죽은이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에서 지우자는 것도 아니다.
‘햄렛’의 유명한 대사.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도 당연히 등장한다. 두 번 등장하는데 한 번은 윌의 입을, 한 번은 연극 배우의 입을 빌린다. 윌이 부두에서 뛰어내릴까 고민하면서 저 대사를 읊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까만 바다를 바라보며 윌이 읊조리는 장면은 윌 역시 아들 잃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애도, 그리고 아이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그는 알고 있다. 주인공에 아이의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 속에서 영원히 살게 한 것이다. ‘햄렛’이란 이름이 불릴 때마다 ‘햄렛’이 죽음에 대해 말할 때마다 관객들이 그의 이름을 단 배우를 보고 웃고 울 때마다 아이는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히 사는 것이다. 연극을 끝까지 관람한 아녜스도 윌의 마음을 알고 남편을 이해하고 아들을 보냈으리라.
영화는 구멍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숲속 나무 줄기와 뿌리 사이 응달이 진 구덩이, 연극 무대 속 배우들이 등장하는 출입구, 매의 무덤 등 넓게 펼쳐진 스크린 중앙에 그것들을 배치한다. 그것은 윌과 아녜스의 침대를 비출 때 동일한 위치를 가리킨다. 이는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의료 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죽음이 두렵지만 중세 시대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시어머니도 아이를 셋 잃었다. 하나는 일곱 살, 둘은 아기 때 잃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상실을 감내해야 했을까. 죽음은 어느 시대에나 고통스럽고 그것을 견디는 것은 더욱 괴롭다. 하지만 그들을 잃었다고 해서 삶이 끝나지 않는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얼마 전 보았던 ‘센티멘탈 밸류’가 떠올랐다. 부끄럽게도 한 가족에 대해서만 해석한 것과 달리 이동진 평론가는 ‘센티멘탈 밸류’를 예술의 존재 의의에 빗대어서 설명했다. (이동진의 파이아키아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으니 해당 영화를 재밌게 본 분이라면 꼭 한 번 보기를 권한다.) 창작을 하려는 사람으로서 내가 구상하는 글이 너무 많이 반복되어서 보잘 것 없고 지루하지 않을까 무한하게 고민한다. 소위 ‘나무야, 미안해’, 혹은 ‘지구야, 미안해’까지 번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누군가의 시간을 빼앗는 건 아닐까 하고 그만 글을 쓰는 게 맞지 않을까 낙담하기도 한다. 하지만 겉으로 봐서 비슷해 보이는 것들이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시대에 맞게 또 사람에 맞게 다르게 보인다. 사람마다 다른 가치로 다가오는 것이다. ‘햄넷’도 그러하다. 영화 속 ‘햄렛’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 관객마다 다른 각도로 깊이가 다른 슬픔으로 다가간다. 아녜스에게는 ‘햄넷’을 잃은 아픔을 느끼지만 그 옆에 있는 다른 관객은 자신의 경험에서 ‘햄렛’을 자신의 아이, 혹은 남편 혹은 아내로 치환하고 슬픔을 삼킬 것이다. 함께 본 동생 바르톨로메오마저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다른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연극의 마지막, 햄렛이 죽을 때 관객들이 그를 향해 손을 내뻗는 장면은 ‘햄넷’에게 내뻗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는 몸을 태우는 열병 속에서 고독하게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뻗은 온기와 응원 속에서 어둠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어둠을 향해 돌아서서 용감하게 나아가는 장면은 죽음을 경험한 모든 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답은 하나가 아니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할 수 있다. 주저 앉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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