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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Aug 27. 2021

어쩌다 스웨덴 PROLOGUE

스웨덴 스톡홀름·예테보리·키루나·웁살라 여행


어쩌다 스웨덴을 다녀왔다.


어쩌다, 라는 단어 뒤에 숨어 생각 자체를 놓아버리는 삶은 좀 멈춰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그게 참 어렵다. 특히, 이 여행에는 더욱. 다녀온 지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스웨덴을 떠올리면 물음표가 뒤에 따라붙는다. 그 많고 많은 나라들 중에 왜 하필 스웨덴이었지?


여행에 대한 환상은 나에게 조금 빨리 찾아왔었는데, 딱 그만큼 빨리 사라졌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나, 교내 백일장의 글제가 '여행'이었을 때 썼던 짧은 글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대충 '사람들은 여행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좋아하는 거다,' '우리에게 일상인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여행지인 걸 보면, 우리에게 아름다운 여행지도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고 답답한, 기껏해야 괴로움이나 건네는 일상일 것이다,'와 같은 내용이었다. 나름대로 고민하던 여행의 상대성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보니 삐딱함도 어느 정도 함유되어 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대상에는 실체가 있을까, 떠나온 그곳 자체가 좋은 게 아니라 어디로 떠나왔다는 사실이 좋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진정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와 같은 반문. 일단 나는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기에, 여행을 좋아한다 말할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단정지은 채 살아왔다. 물론 지금은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여행이 될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뿐더러, 나의 첫 홀로 여행의 가장 큰 목표 또한 벗어나는 것이었음을 인정하니, 열여섯의 비관은 나름대로 떨쳐낸 스물둘이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변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여행에 대한 로망이 별로 없던 내가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던 건 8월과 9월 사이. 모든 사람이 각자의 힘듦을 안고 살아간다는 걸 아는데도, 그리고 당장 눈앞에만 해도 같은 짐을 짊어진 사람들이 잔뜩 보이는데도, 그런데도 유난히 힘든 시기가 있었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으나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게 너무나도 선명히 보이던 날들. 그 속에서 서로를 미워하며 상처를 주고받던 사람들. 그것들은 나를 직접적으로 향한 게 아니었음에도 나는 많이 아팠다. 증오를 싫어한다 말하면서 증오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을 증오하고 있었던 나. 나의 증오가 결국에는 다시 나를 향하는 뫼비우스의 띠 안에 갇혔던 여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웠던 날들은 끝내 도망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임기가 끝나는 날,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나도 모두를 모르는 곳으로. 그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고, 내가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면, 그렇게 되면 굳이 서로를 알아가려 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을 것 같았고, 그러면 서로에게 기대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진, 전혀 다른 세계에서 혼자가 되고 싶었다. 종종 꿈꿔오기만 했던 달나라를 가야할 때가 온 것이었다. 원치 않는 힘이 멋대로 나를 짓누르지도 끌어당기지도 않는,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곳. 더 이상은 어려웠다. 도망쳐야 했다. 그래야만 살아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보니, 나에게는 달나라의 좌표가 없었다. 떠나기 위해서는 경위도를 임의로라도 지정해야만 했다. 아무런 제약 없이 떠나도 되었더라면 아이슬란드 정도가 되었을 테지만, 면허가 없던 내게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곳이라는 생각에 제외시켰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의 첫 착륙을 허해줄 달나라를 좁혀나갔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오랜 이상향이 되어주던 북유럽, 그 중에서도 혼자 가도 괜찮은 데라고 언급되는 곳들을 위주로 찾아봤다. 물론, 그 목록에는 거의 모든 북유럽 국가들이, 그것도 최상위권에 랭킹되어 있었다. 심지어 다녀와서 다시 찾아보니 스웨덴보다 높게 평가되는 나라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왜 하필 스웨덴이었는가 하면, 어느 새벽에 봤던 글의 차트에서 유난히 눈에 띄던 도시가 스톡홀름이었기 때문이다. 몇 년도 자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때는 스톡홀름이었다. 그렇게 스웨덴행을 결정했다.


교보문고에 가서 북유럽 가이드북을 샀지만, 그래놓고도 망설임은 한참이었다. 며칠 동안 겨우 용기를 모아 비행기 티켓을 끊었지만, 언제든 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붙잡고 싶었기에 숙소는 체크인 하루 전날까지 취소 가능한 것들로 예약했다. 이것들이 장장 세 달 동안의 일들이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12월이 되어버렸다. 점점 가시화되는 여행 앞에서는 기대 대신 걱정만 늘어갔고, 여행에 대한 확신은 갈수록 줄어들기만 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로부터 "망설이지 좀 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분기에 두 번째로 듣게 된 말이었다. 접점이 전혀 없는 두 사람이 같은 얘기를 건네다니, 결코 쉽게 뱉어진 말은 아니었겠구나 싶었다. 나는 그동안 무얼 그리도 많이 망설였을까. 이 여행만큼은 그런 나로부터도 벗어나고 싶었다. 달나라에 가는 거니까.


출발이 2주 정도 남았던 날, 비행기 티켓을 바꿨다. 예정했던 것보다 7일을 더 있다 오기로 했다. 21년 살면서 가장 과감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15일 간의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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