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브릿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관객의 시점을 혼동시킨다. 이것을 영화로만 봐야 하는지, 영화를 전제로 한 실화라 믿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보통 관객들은 후자를 택한다. 자신이 영화가 아닌 역사의 한 장면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그것은 자국을 다룬, 영웅적 이야기일 때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영화를 영화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닌, 현실과 직결시켜 자연스럽게 그 시대를 경험했던 사람처럼 증인이 된다. 단순한 감상을 넘어선다.
영화를 본 후, 우리나라의 실화 바탕 영웅적 영화들이 이런 느낌일까 생각해보았다. <스파이 브릿지>는 1950년 냉전 시대를 다룬 영화다. 미국이 주인공이며, 모든 것은 미국의 입장으로 서술된다. 미국의 대표가 아닌 민간인임을 강조하는 ‘도노반’의 전형적인 서민 영웅물이라고도 칭할 수 있다. 이는 가족이 뉴스를 통해 아빠의 숨겨진 희생과 노고를 알게 되는 결말에서 두드러진다. 누가 봐도 멋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나는 미국, 독일, 러시아의 국적을 가지지 않은 대한민국 사람이기에 영화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영화를 통해 그 시대의 시대상을 더불어 벗어날 수 없었던 인물상까지 살펴볼 수 있다.
브릿지 밖의 사람들
주요 인물이 많으면 주변 인물들을 신경 쓰기 어렵다. 주요 인물들의 입체적인 서사에 집중하느라 주변은 프레임 밖의 선택적 요소로 전락한다. 각 국가의 협상가들까지 집중해야 할 인물이 굉장히 많다. 관객들은 그들의 건조한 대화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파악하기도 벅차다.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결국 동독과 서독 사이에 벌어지는 무차별적인 살인, 낚시를 간 줄로만 아는 도노반의 가족들 모두 도노반의 전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도노반의 시선인 하이레벨 앵글로 그들을 바라본다. 같은 실화 바탕 영화임에도 인물과 사건에 집중하고, 시대의 서사성은 건조하게 다룬 <커런트 워>, <이미테이션 게임>과는 전혀 다른 영화 구성이다. <스파이 브릿지>의 기차 안 장면은 굉장히 단편적이고, 권위적으로 다가온다. 냉전 시대의 비윤리적 사항들을 서사로 담아냈으나, 모두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몽타주로 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실화를 명시한 영화임에도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실화’를 주장하는 ‘픽션’에서 무엇을 식별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실재와 허구를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역사는 결국 기억의 망각이다. 우리는 이 뒤섞인 가상의 영역에서 무엇을 망각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거울과 자화상
아벨이란 캐릭터는 정말 매력적이다. 아기 새가 처음 본 생물을 엄마로 알 듯, 우리는 도노반보다 자화상을 그리는 아벨의 모습을 먼저 봤다. 웃는지, 무표정인지 모를 그의 얼굴은 스파이라는 호칭이 정말 적합한 인물이다. 꿈벅거리는 낙타 같은 속눈썹도 인상 깊었다. 그가 수차례 태연하게 내뱉는 ‘Would it help?’는 쉽게 속내를 간파하기 힘들다. 가장 건조한 인물임에도 눈길이 가는 인물이다. 아벨은 태연하다 못해 우아하기까지 하다. 무심하게 뒷문으로 태운 차를 타고 떠난 아벨을 보고, 도노반은 쉽게 떠나지 못한다. 전혀 이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신념 속에서 도노반은 시선을, 아벨은 그림을 남겼다.
자국을 위한 영화
실존하는 미국의 역사와 영웅을 영화로 재구성함으로써 감독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역사를 어떻게 지켜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거리감이 든 것일까. 단순 픽션이었다면 극찬했을 법한 여러 몽타주와 앵글, 인물상들이 달갑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실화를 전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실화 속에 갇히면서 사실적으로 변하지만, 동시에 지켜야 할 표현의 틀이 더욱 좁아진다. 감독은 영화의 시작과 끝에 실제 역사를 자막으로 보여준다. 실제를 강조해 관객의 감동을 극대화하고 싶었으리라 추측된다. 픽션에 '실화'라는 조건이 걸리는 순간 관객과 감독은 영화 해석에 관해 끝없는 책임감에 휩싸인다. 나 또한 영화와 사회라는 이 논제에 답을 찾지 못했고, 끊임없이 고민할 것이다.